대담

벗겨지지 않는 시의 ‘빤쭈’ 벗기기


김점용 _ 이재훈

 


밤이 되면 으레 검은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검은 우물. 그렇다. 검은 우물은 바닥이 없다. 그 검은 우물이 수만 가지 색깔로 보이기도 한다. 심연이란 그런 것인가. 배추흰나비 한 마리 팔랑거리는 단아한 이미지 한 컷이 아름다울 수 있는 그런 곳인가.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맡에 놓인 ‘열두 개의 꿈’. 그리고 계속 따라다니는 꿈…
꿈처럼 속설이 많은 건 없다. 속설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속설을 믿는다. 결국 꿈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로는 규명할 수 없는 현상일까. 꿈은 하나의 심상이다. 시각적 심상이 부각되기는 하지만 그 심상 안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심상이 함께 놓여 있다. 이 스펙트럼이 융합(融合), 치환(置換), 상징, 형상화(形象化) 등의 메커니즘을 거치면서 ‘꿈’이라는 이해불가한 심상을 기억하게 만든다. 그 기억되는 심상이 회상몽인데 그것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꿈’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꾸는 대부분의 꿈은 기억하기 어렵다. 아니, 금방 기억에서 삭제된다. 과학적인 견해에 따르면 꿈은 깊은 수면에 들지 못했을 때 꾼다고 한다. 그러면 꿈을 많이 꾸는 사람은 깊은 수면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가. 신경이 예민하거나 정신의 오감이 불안한 사람에게 꿈이 더 많이 찾아오는 것인가. 그럼 당신은 지금 얼마나 많은 꿈을 꾸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시인의 ‘빤쭈’는 좀 벗겼을지 몰라도 시의 ‘빤쭈’ 벗기기에는 실패했다. 이미 우리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꿈에 대한, 꿈과 관계된 그리고 꿈을 이루는 다양한 얘깃거리는 존재했다. 나는 시인의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그 웃음이 좋았다. 우리가 희망이라고 부르는 꿈과 시인이 말하는 꿈과의 막막한 거리를 그 웃음이 대신해 주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무슨 이유에선지 아주 유쾌해져 있었다.

이재훈: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시집 뒷면에 쓰신 ‘시인의 말’에서 “시는 결코 ‘빤쭈’를 벗지 않는다”면서 “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이 없다”고 하셨는데 대담을 맡은 제게는 난감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대담이란 시인의 ‘빤쭈’를 확, 벗겨버리는 일이니까요.(웃음) 그래도 오늘은 조금이나마 시늉이라도 내줘서 독자들에게 좀 더 시인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점용:하하하, 그거 재밌고 중요한 얘긴데요… 거기 쓴 건 제가 ‘빤쭈’를 벗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시가 그렇다는 얘기지요. 그러니까 저로서는 할 말이 없는 것이고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이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크게 산문적 언어와 시적 언어로 나누어 얘기할 때 산문적 언어는 대체로 명쾌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니까요. 그런데 시적 언어는 전혀 다르거든요. 논리나 이성, 혹은 과학적 언어로 풀 수 없는 영역에 놓여 있지요. 그러니까 그 말은, 아무리 애써봤자 그(시) 내용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는 뜻에서 한 거지요. 이 시인도 시를 쓰시니까 아시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어떤 구절이 나올 때가 있잖아요. 일종의 무의식적인 작용 같은 거 말입니다.

이재훈:네, 그럴 때가 많더군요. 제 개인적으로는 등단작을 포함해서 많은 시가 그런 경우거든요. 말하자면 뮤즈가 찾아와서 시가 쓰여진 경우라고 할까요?(웃음) 나름대로 자의식이 많이 개입하고 있겠지만요.

김점용:그런 면에서 보면 시인은 바보지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써대니까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런 시적 언어와 산문적 언어가 합쳐져야 인간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만으로 이 세계와 인간을 완전히 설명할 순 없으니까요. 우리가 보통 시를 ‘불립문자’라고 하는 것, 또는 말해진 방식과 말하는 성질이 다르다고 하는 건 그 때문이지요. ‘빤쭈’ 안에 감춰져 있으니까 미루어 짐작할 뿐이고 느낄 뿐이죠. 이거 좀 야한가요?(웃음)

이재훈:빤쭈 얘기는 그쯤 해두고, 고향이 통영이신데 유적지도 많고 예인들도 많이 배출한 고장이지요? 저도 그곳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만…

김점용:네, 태어나서 고등학교 때까지 통영에서 죽 살았습니다. 한때는 해저터널과 착량묘 근처에 살아서 이 시인처럼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많이 보고 자랐죠.(웃음)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잔 날도 많았습니다. 이 시인이 대표로 책임지세요.

이재훈:그럼 나중에 제가 한잔 사지요.(웃음) 고향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시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나 형과 형수, 그리고 조카 얘기도 나오더군요. 선생님 시에서 가족사는 중요한 시적 경험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강박적 인식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하는 관점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에서는 실제 경험을 극단적으로 왜곡하고 변형된 상태로 전달하는 게 많습니다. 실제의 가족사는 어떠했는지 조심스럽게 묻고 싶네요.

김점용:시에 있는 대로 다 사실이지요. 오히려 실존인물들 때문에 밝히지 않은 것들도 많은데, 뭐 중요한 것들은 대충 다 나왔습니다. 한 가지 해명해야 할 것은 시에 등장하는 자폐아가 친조카는 아니구요, 그 자폐아의 아버지를 제가 형이라고 부르니까 독자들이 조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자폐아 우인이는 제가 예전에 다니던 직장 상사의 아들이었거든요.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직장이 대기업 홍보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2년 정도만 다니고 확실하게 망가지든가 아니면 공부를 대차게 좀 해보든가 그럴 참이었는데 생각보다 직장생활이 재밌더군요. 일도 쉬웠고 돈도 많이 주는 데다, 무엇보다 넥타이를 안 매도 될 정도로 자유롭고 시간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게 얼마 못 갔어요.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평소 직장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다가 정말 그만두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나서 막판 무렵엔 자연스레 술자리에 자주 끼이게 됐죠. 그때 부서 과장님의 아들이 자폐아라는 걸 알게 됐고, 직장을 그만두고도 그 집에 자주 갔었죠.

이재훈:시에서의 자폐아 ‘우인’이는 꿈과 현실, 모두에 공존하는 인물이네요?

김점용:그렇죠. 우인이와는 그렇게 인연이 되어 일 년 정도 왕래를 하다가 그 뒤로는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우인이가 특수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시간도 그렇고 다른 사정도 있었고요.

이재훈: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시집 출간 후 많이 들어본 질문일 텐데요. 선생님의 시는 시집의 해설에서 상세히 설명한 대로 꿈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제시하는 전반부와 깨어 있을 때 꿈에 대한 시적 자아의 감정이나 사유, 혹은 상황을 진술하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프로이트 이래 정신분석학이 문학비평의 새로운 잣대 구실을 하면서 꿈에 대한 해석이나 연구가 아주 활발하게 행해졌습니다. 꿈에 대해 말할 때 어떠한 사유방식으로 작품에 접근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봤는데요. 기술되어야만 하는 꿈이라면 그것은 꿈꾼 자의 특별한 개성을 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개성은 인격 자체에서 발생할 수도 있고 어떤 특수한 경험으로부터 발생할 수도 있겠지요. 이 두 가지 모두가 다 꿈꾼 자의 개성을 말하는 좋은 준거가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은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쉽게 말하면 이상한 꿈을 꾸는 자가 굳이 자기 해명을 한다면 자기 자신에게 무게를 두느냐 아니면 외부 환경에 무게를 두느냐 하는 문제겠죠.

김점용:물론 아시겠지만 그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거지요. 환경이 개성을 만들고 개성이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굳이 얘길 하자면 제 경우엔 가족사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가족사의 범위를 넓혀 개체의 유전적인 정보까지 포함한다면 말할 것도 없지요. 제가 좀 독특한 꿈을 많이 꾼 건 사실이고, 자기 환영(幻影)이나 환청도 자주 경험했는데, 아무래도 이런 경험들은 가족사의 왜곡이나 굴절에서 생겨난 측면이 클 겁니다. 그리고 원래 제가 꿈을 많이 꿨습니다. 꿈을 많이 꾼다고 해서 그게 장애는 아니거든요. 누구나 많은 꿈을 꾸죠. 꿈이란 게 어차피 무의식의 한 표상인데 그걸 두고 개성적인 무의식이다, 아니면 몰개성적인 무의식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여느 사람과 다른 게 있다면 대부분의 꿈들을 기억한다는 것이겠죠.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자면 긴데, 간단히 말해 그것도 저는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정신분석학이나 신화에 관심을 갖고 자기 꿈을 들여다본다면 충분히 기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재훈:꿈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있습니까?

김점용:처음엔 꿈이 너무 희한하니까 이게 무슨 뜻인가 싶어 일기장에 써보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악몽에 시달릴 때가 많아지니까 이거 좀 정밀하게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그쪽 방면의 책도 보고 사람들과 만나 얘길 하다 보니 조금씩 아마추어 분석가가 되어 갔지요. 악몽을 자주 꾸게 된 건 정확하지는 않지만 직장생활과 관련이 깊다는 생각이 들고 다른 원인도 있는 것 같고 그래요.
이런 걸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이 시인께서 빤쭈를 벗으라고 하셨으니까, 아마 그 무렵에 가진 첫 성경험도 한 축으로 작용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프로이트 이론의 밑바탕이니까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고, 직장생활과 관련해서는 일종의 스트레스가 꿈으로 나타난 거겠죠. 직장생활이 쉬웠다고는 하지만 직장도 엄연한 이익집단이고 경쟁사회인 데다, 홍보실이다 보니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고, 쓰기 싫은 글을 쓰면서 자의식에 시달려야 할 때도 많았으니까요. 학교 다닐 때는 이해관계에 그다지 많이 얽매이지 않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것 자체가 굴욕이고 치욕이기 때문에 내적으로 꼬일 수밖에 없었겠죠. 그것이 유년의 잠재된 욕망이나 기억, 성적 욕망과 뒤엉키면서 꿈으로 나타났을 거라고 어렴풋하게 추정해보는 거지요. 또 그 무렵에 재밌는 모임이 있었는데 저를 포함해 세 명이 ‘꿈읽기’ 모임을 만들었어요. 각자 꿈을 이야기하고 서로 분석해주는 거였지요. 관련서적도 함께 읽었고요. 개인 사정 때문에 얼마 가지는 못했지만 제가 꿈에 대해 분석가가 필요하다고 느낀 건 그 모임 때문이었죠.

이재훈:꿈 연작시에 일련의 번호가 있습니다. 그만큼의 분량을 쓰신 건가요? 실제의 꿈을 시로 쓰려면 약간의 변형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을 텐데…

김점용:그것보다 훨씬 많이 썼죠. 꿈이란 게 무의식의 심연처럼 무궁무진하니까요. 대부분 기록된 채 방치되어 있고, 요즘은 융이 말한 ‘큰꿈’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거의 버리죠. 그리고 시와 관련해서는 꿈을 바로 시라고 우기기엔(?) 제 양심이 허락칠 않았어요. 공짜로 건지는 거니까. 그리고 서구의 초현실주의가 보여준 한계도 뻔했고요. 최소한 꿈이 현실과 관계 맺는 접점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하셨듯이 시로 쓰려면 변형은 어쩔 수 없지요. 대개는 하나의 영상을 언어로 번역하는 거니까 기록 자체가 왜곡이죠. 그걸 ‘2차 왜곡’(꿈 자체의 왜곡이 1차 왜곡이다)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꿈 한 토막을 전부 다 쓸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애로였어요. 그래서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만 잘라서 옮겨놓은 겁니다. 번호를 매겨 놓은 건 처음엔 개성화 과정으로 시집을 배열할까 싶어서 그랬는데 나중엔 다시 흔들어버렸죠. 어떤 식으로 정형화한다는 게 꿈이나 시의 기본적 성격과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재훈: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보면 꿈 해석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꿈의 내용에 주목하여 어떤 관점에서 유사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내용으로 대체하려는 것, 이것이 ‘상징적인’ 꿈 해석이죠. 예를 들면 요셉이 해석한 파라오의 꿈이 그렇고 시인들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꿈들은 대부분 이러한 상징적인 해석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가 암호해독법인데 이건 완전히 설득력 없는 얘기 같더군요. 시인들이 만들어낸 꿈들이 상징적인 해석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김점용:꿈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지요. 금방 언급하신 프로이트는 소망 충족을 바닥에다 놓고 풀어갑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보는 거지요. 반면에 융은 보상성의 원리로 풀어가고요. 꿈이 한 개인에게 있어 어떤 부분을 보완해주는 기능을 한다고 보는 거죠. 크게 보면 비슷하지만, 주체의 욕망에다가 포인트를 두느냐 아니면 인격의 전체성에다 강조점을 두느냐가 서로 다르지요. 최근의 뇌생리학에서는 잠을 기억 저장을 위한 것으로 보고, 꿈은 그 저장 과정에서 파생되는 무엇으로 이해하는 모양입니다.
사실 해석이란 ‘다르게 말하기’에 불과한데, 꿈이 문학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꿈이 지닌 은유나 환유적 성질입니다. 꿈이 시의 상징과 유사한 것은 그 때문이지요. 경험과학이나 실증과학의 언어로 말할 수 없으니까 상징적 언어(시적 언어)로 말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처음엔 프로이트의 논리에 반해서 푹 빠졌는데 나중엔 회의가 많이 들더군요. 1대1 대응으로 해석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고, 오히려 해석의 범위를 넓혀서 상징적 역할 그 자체를 강조하는 융 계열의 접근이 유효하다고 봅니다. 시집의 시들 중에는 꿈에 대한 느낌이나 해석이 여러 번 달라진 게 더러 있습니다.

이재훈:꿈 속에 같은 성격과 조건을 가진 동일인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의식이 적극적으로 개입된 무의식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시에 나타나는 우인이를 보면 화자는 자폐아 우인이와 동일시하고 싶어하거나 동일시되어 있다고 말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우인이가 자신의 삶에 많은 부분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점용:사실 직장 다닐 때에도 자폐아라는 별명 아닌 별명을 들었습니다.(웃음) 그러니까 그 자폐아를 보는 순간에 강력한 친화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자폐에 대한 자료를 보면 자폐아 자체가 대단한 매력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요. 우인이를 보면서 저의 모습을 본 것이겠지요. 기본적으로 투사이면서 일종의 동일시라고 봐야죠.

이재훈:결국 시인과 우인이가 꾸는 꿈은 인간 세계가 만들어 놓은 질서와 공존하기 힘들다는 얘기죠. 병든 화자와는 달리 천성적으로 하나를 덜 가지고 태어난 화자니까요.

김점용:역설적으로 말해 닫혀 있어서 완전한 세계일 수도 있는데 그건 환상이죠. 나머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뭐가 뭔지.(웃음)

이재훈:신작시가 첫 시집에 비해 많이 달라졌습니다. 상징에서 알레고리로 간 듯한 생각인데요. 앞으로 시작 방향은 꿈 이야기에서 다른 곳으로 간 건가요? 시 「분석가」는 시인이 꾼 꿈의 해석을 둘러싼 시인과 평론가의 알레고리로 읽히는데요.

김점용:예. 달라진 부분이 있습니다. 발표된 시를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좀 곤란하지만 「분석가」는 사실 나 자신과의 대화입니다. 꿈을 꾸는 나와 그 꿈을 해석하려는 나와의 관계를 다뤄본 것이지요. 반복되는 얘기지만 시적 언어가 산문적 언어의 이면, 그 대극의 어떤 것들을 드러냄으로써 이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때, 달라졌다고 해도 어찌 보면 같은 길을 가는 셈입니다. 다만 첫 시집이 무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준 것이라면 이번 시들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요.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 마찬가지겠지요.

이재훈:프로이트의 논문 중에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이 시인들의 꿈을 이해하는 데 좋은 이해의 지평이 되었는데요. 그 글을 보면 문학 창조자는 놀이를 하는 아이와 동일한 것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놀이는 현실 세계의 가시적이고 촉지할 수 있는 사물들에 기대어 상상적인 대상과 상황들을 보강하기를 즐기는 것인데요. 아이의 이 즐김 자체가 공상적 세계를 진지하게 창조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의 놀이가 성인이 되면서 놀이 대신 공상을 따라가는 것으로 대체된다고 하는데요.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공상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그렇게 이해해야 할까요?

김점용:공상보다는 영어의 ‘delusion’이 더 정확할 것 같은데 일종의 망상체계라고 봅니다. 프로이트의 개념 중에 시인이나 예술가와 관련해서 ‘승화(sublimation)’라고 있지요? 그게 참 프로이트의 논리에서 아킬레스건 같은 건데, 여기서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자체 모순에 빠질 위험이 굉장히 커요. 어쨌거나 시인이나 예술가의 경우, 유아적인 망상체계의 고집이 큰 역할을 한다는 건 맞는 말인 듯해요. 저는 시나 예술이 주는 미적 즐거움은 이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시가 주는 유일한 교훈이란 ‘이렇게 살면 망한다’ 그 이상은 없다고 봐요.(웃음) 쾌락원칙만 고집하는데 어떻게 제대로 살겠어요, 안 그래요?

이재훈:그래서 시인들이 시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가 봅니다. 짜릿한 놀이이기 때문에. 장시간 감사합니다. 인사동의 밤이 벌써 깊어졌네요.


출전 : <나는 시인이다>(팬덤북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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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척 노력해도 종국에는 오은인 걸 들키고 마는 시

 

 

 

오은 ․ 이재훈

 

 

 

이재훈 : 반갑다. 오은 시인. 우린 오래 만난 사이인데 새삼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그냥 편하게 얘기하기로 하자.

 

오은 : 좋지, 형.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 못 본 지 두 달은 넘은 것 같네. 호프집에서 맥주 한잔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듯 답할게.

 

이재훈 : 세월호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요즘 마음이 무겁고 괴롭다. 슬픔과 분노가 교차되어 한 마디로 멘붕 상태다. 어떻게 잘 버텨내고 있는가.

 

오은 : 그제는 안산에 다녀왔어. 유가족들이 단상에 올라가는데 모인 사람들이 다 훌쩍이더라. 유가족 한 분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지. 분노와 무기력, 슬픔 등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이면 결국 울게 되는 것 같아. 울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한동안은 넋이 좀 나간 채로 지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이재훈 : 요즘 많이 드는 생각이 과연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이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세월호와 같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시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들. 이런 때에 한 정치인이 시를 써서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시가 희화화되지 않았나. 오은 시인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하다. 

 

오은 : 고통을 덜고 위로를 해주는 것은 시가 할 수 있는 부차적인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어. 시인이 그 시를 쓸 당시에 기대했던 바가 아닐 수도 있고.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는 아이를 잃은 부모가 나오잖아. 시는 어쩌면 제과점 주인이 그 부모에게 건네는 롤빵보다 하찮은 것일지 몰라. 허기를 달래주지도, 가시적으로 온기를 전달하지도 못하니까. 그러나 나는 시가 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 이 어처구니없는 참사를,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각자의 말로, 우리의 말로 기억하는 거지.

 

이재훈 : 내게 오은 시인은 막내동생과 같다. 나뿐만은 아닐 텐데. 문단의 교유가 넓은 편 아닌가. 오은 특유의 친화력이 부러울 때가 많다. 오은의 어머니를 뵐 때 느끼는 것인데,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았구나 생각했다. 그 천진무구의 성정은 어디로부터 연유된 걸까?

 

오은 : 집이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어. 아버지가 선생님이었는데, 우리 집은 엄격하기보다는 자유로웠지. 우리가 거짓말할 때를 제외하곤 매를 들지 않으셨으니까. 단칸방에 꽤 오래 살았는데, 덕분에 부모님과 형이 거의 항상 가까이 있었어. 귓속말을 해도 다 들릴 정도였어. 형이 무슨 책을 읽는지, 어머니가 무슨 색깔의 매니큐어를 칠하는지, 아버지가 어떤 TV 프로그램을 좋아하시는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 어머니의 긍정적인 성격을 닮은 것도 한몫한 것 같아. 가난이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부모님이 우리가 부족한 거 없이 자랄 수 있도록 아낌없이 베풀어주셔서 그랬을 테지만.

 

오은_이재훈_ 약수역_2014.5

 

이재훈 : 사회학을 전공하고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문학이 아니라 사회학을 택하게 된 이유라도 있는가? 그리고 문화기술대학원에서는 어떤 연구를 했나. 그 연구의 결과물로 로봇서사를 다룬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를 출간했다. 독자들을 위해 소개 부탁한다.

 

오은 : 학창시절에 문학을 전공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었어. 알다시피 나는 친형 덕분에 등단을 했으니까. 중고등학교 시절 큰 대회에서 몇 차례 상을 받긴 했지만, 그건 대부분 산문이었고. 무엇보다 나는 내가 쓰는 것이 시가 될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거든. 수험생이 으레 그랬듯 나 역시 교과서 시들만 접했으니까. 국문학은 내가 범접하기엔 너무 멀리 떨어진 학문이었던 셈이지.

사회과학대학에 입학하고 1학년 때 전공 탐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 나는 원래 기자가 꿈이어서 언론정보학과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수업을 듣고는 실망하고 말았지. 내 기대와는 전혀 달랐거든. 심리학, 경제학, 외교학, 인류학 등 사회과학대학에 있는 다른 전공들을 듣다가 사회학이라면 머리는 아프지만 기분 좋게 공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거리낌 없이 의심할 수 있었으니까.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바라보는 고유의 시선을 갖고 싶었지.

문화기술대학원은 ‘융합기술’이라는 것이 대한민국에서 막 주목받기 시작했을 때 문을 연 대학원이야. 국문학, 법학, 경영학, 미학, 컴퓨터 공학, 건축학, 산업디자인 등 다양한 전공 출신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지. 겹치는 전공이 거의 없었을 정도니까.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구현하는 데까지가 우리가 하는 일이었지. 그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작업이 팀으로 이루어졌어. 가령 나 같은 사회과학도가 어떤 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말문을 트면,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친구가 그것이 현재 어디까지 가능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친구는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야 사용자들에게 좀 더 편안할까를 고민하고 경영학을 전공한 친구는 그것이 시장에 어떻게 어필할 수 있을지 따져보는 거지. 얼핏 분리된 작업 같지만, 한자리에 모여 항상 머리를 맞대고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작업했어. 그 친구들과의 작업 경험은 아마 평생 동안 잊을 수 없을 거야.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라는 책은 ‘로봇’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산업자원부( 산업통상자원부) 프로젝트였어. 로봇이 변화함에 따라 그것을 가지고 만들어진 콘텐츠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피는 게 목적이었지. 나는 영화, 소설 등 서사를 다른 하나의 축으로 세우고 작업했다면 어떤 친구는 무용(퍼포먼스)을 다루는 작업을 했어. 로봇과 교육, 로봇과 디자인, 그리고 로봇과 애니메이션을 함께 엮어서 살펴본 친구들도 있었고. 이른바 ‘로봇 시리즈’로 출간된 이 책들을 읽어보면 우리가 로봇이라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협소한 개념인지 파악할 수 있을 거야. 로봇이 어떤 존재로 우리에게 인식되어왔는지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고.

 

이재훈 : 색과 그림을 다룬 책 <너랑 나랑 노랑>을 출간했다. 오은 시인은 문학과 미술뿐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다방면의 문화 취향에 대해 들려 달라.

 

오은 : 조예가 깊지는 않다고 생각해. 미술, 음악 등 다른 분야에 몸담은 사람들과 협업을 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들과 대화하기에 큰 무리가 없는 정도야. 좋아하는 건 어떻게든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하잖아. 그러다 보니 틈나는 대로 찾아서 읽고 보고 들었지. 시간이 없어서 요새는 전시는커녕 영화도 많이 못 봐. 많이 속상하긴 한데 언젠가는 찾아올 여유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지.

취향에 대해서라면 크게 할 말이 없어. 두루두루 다 좋아하거든.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색과 그림을 다룬 책을 낸 것처럼 색을 잘 구사하는 화가들을 좋아해. 앙리 마티스나 파울 클레 같은 화가를 예로 들 수 있겠지. 음악은 신스팝(synthpop)과 프로그레시브 록을 좋아해. 기타보다는 건반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요새 부쩍 들어. 나는 줄곧 내가 기타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웃음)

요 몇 년 사이에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이 많아졌어. 몇 년 전부터 타이포그래피 아티스트들과 작업할 기회가 있었는데, 시가 읽는 것에서 보는 것이 될 때 어떤 질감을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지. 작년에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에서 영상으로 내 시를 보여줄 기회가 있었는데, 아예 해당 미디어에 걸맞게 시를 새로 썼거든. 서울역 근처를 지나가는 시민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을 거야. 앞으로도 기회가 생기면 협업을 계속해서 해나가고 싶어.

 

이재훈 : 큰 교통사고로 인해 생사를 넘나든 적이 있지 않은가. 아직도 많은 시인들이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되면 가슴을 쓸어내린다. 한동안 기억을 잃어버렸던 실존의 경험이 시 쓰기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오은 : 글쎄, 나는 그때가 좀 뿌예. 많이 아팠다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할 정도니까. 물론 재활 치료의 고통은 아직도 생생하지만. 정말 끔찍했지.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볼게. 교통사고의 충격으로 머리에 물이 찼었는데, 그 물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니까 사고 직후부터 수술 직전까지의 기억이 모조리 사라진 거야. 그사이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지인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지. 정말 가관이더라고. (웃음)

그때의 기억을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은 없어. 단지 나는 내가 정말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지. 그 뒤로 아픔과 슬픔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 듯싶어. 한동안은 병원에 가서 대기실에 앉아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만 봐도 눈물이 났어. 그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아니까. 어떻게 버텨내고 있는지 아니까. 시무룩한 표정의 보호자만 봐도 어머니 생각이 나서 가슴을 쓸어내렸지. 나는 진짜 효도해야 돼.

 

이재훈 :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부터 오은 시인 하면 명명되는 것이 ‘말놀이’로 대표되는 언어감각이다. 말놀이나 펀(fun), 유희의 수사법은 오래된 전통을 가진 것이지만 오은의 언어는 다른 지점이 있다. 나는 그것이 인문학적 사유와 사회성을 겸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인문학적 말놀이라고 할까. 말놀이로 투영되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

 

오은 : 글쎄,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말놀이 때문에 주목받았지만, 그것이 내 발목을 잡는 상황이라고 말하면 조금 우스울까? (웃음) 놀이의 세계는 변화무쌍한데, 사람들은 놀이의 가벼움, 놀이의 발랄함만 기억하니까 가끔 안타까울 때도 있어. 아직까지도 “오은? 말놀이하는 애?”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것은 나의 개성을 반영한 말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면서 은연중에 자신이 생각하는 나의 한계를 미리 재단해놓는 것이기도 하거든. 그만큼 놀이가 가진 기운이 내 시를 압도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실은 놀이에서도 자꾸만 규칙을 어기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규칙을 지키면서 교묘하게 배반하는 작업을 하고 싶은 거지. 기존의 언어 규칙에 내가 짠 규칙을 접목한 뒤,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싶어. 이건 형식적인 문제고, 무엇을 쓰느냐의 문제는 또 완전히 다르지. 흔히 놀이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다루고자 하는데, 아직은 내가 미숙한 탓인지 사람들은 형식에만 반응하더라고. 어쨌든 결국에는 내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해.

 

이재훈 : 대표적으로 「ㅁ놀이」를 보면 말놀이, 물놀이, 맛놀이, 몸놀이, 망놀이, 멋놀이, 무놀이, 문놀이, 몽놀이, 맥놀이, 멱놀이, 몇놀이, 맘놀이, 못놀이로 이어지면서 의미가 확장되고 유희가 가속화된다. 요즘도 사전을 읽나? 말놀이의 이면에 숨어 있는 시인의 태도가 궁금하다. 물론 말놀이는 재미있어 하겠지만, 그것 이외에 추구하려는 전략이 있다면 살짝 공개해 달라.

 

오은 : 응, 예전처럼 자주는 못 보지만 아직도 무료할 때 가장 먼저 찾는 친구가 바로 국어사전이야. 요새는 새로운 단어를 발견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내가 익숙한 단언데 잘 사용하지 않는 것들, 뜻을 많이 품고 있어서 그중 일부만 사용하는 것들에 관심이 가더라고. 실제로 그 단어를 실생활에서 사용해보려고 노력도 하고. 입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내 말이, 내 단어가 되는 것 같으니까. 전략이라고 말할 것은 없고, 놀이라는 게 가진 기본적 속성이 즐거움, 흥겨움, 즉흥성 등이잖아. 그 놀이가 다 끝났는데 이상하게 슬픈, 혹은 이상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기분을 갖게 하는 것? 울면서 웃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당도하게 하는 것? 너무 거창한가? (웃음)

 

이재훈 : 두 번째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시인의 말을 보면 “가장 가벼운 낱말들만으로 가장 무거운 시를 쓰고 싶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이 오은 시의 정체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오은의 언어는 경쾌함, 유쾌함, 유희 등의 요소들이 있다. 이런 개성은 한국 시단에 드문 세계이다. 앞으로의 언어 방법도 이 분위기를 유지할 것인지 궁금하다.

 

오은 : 글쎄, 나는 굳이 내가 어떻게 변화해야겠다고 생각한 뒤에 시를 쓰지는 않아.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쓰니까. 이전 질문의 답변과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 양극단에 있는 감정이나 무게, 질감 등이 어떻게 시 안에서 부딪치는지 지켜보고 싶어.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친 말들, 너무나 익숙해서 그 특유의 색깔이 지워지고 있는 말들, 아무러한데 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말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데 붙어 다니는 말들 옆에 붙어 있고 싶어. 내가 해왔던 방식을 전면적으로 뒤엎지는 못하겠지. 그것은 천성에 가까운 것이니까. 단지 단어가 어떤 식으로 문장에 결절을 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일이 잦아지겠지.

 

이재훈 : 나는 두 번째 시집을 ‘부조리’라는 개념어로 읽은 적이 있다.(「부조리한 언어의 건축술, <세계의문학>, 2013년 가을호) 개인적으로 오은 시에 대한 평가가 너무 언어감각과 방법론에만 치중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언어의 껍질을 벗겨내고 시의 속살을 바라보면 문명인의 무기력함과 한 개인의 쓸쓸함이 직설적으로 다가온다. 언어는 재밌게 놀고 있지만 분명 쓸쓸할 때 이 시를 썼을 거야 라고 혼잣말을 할 때가 있었다. 시를 쓸 때 어떤 정서의 감도를 가지고 쓰는가. 예를 들어 슬플 때, 기분 좋을 때, 헛헛할 때 등등처럼.

 

오은 : 쓸쓸하지. 나는 항상 웃고 있지만, 거의 항상 외로워. 외로우면 눈물도 나고 울상도 짓는 게 일반적인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더라고. 근데 그게 나를 포장하는 방식은 아니야. 나는 너무 슬플 때는 웃음이 터져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 쓸쓸함이나 외로움은 연애를 하거나 복권에 당첨이 된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시인으로 살고 있는 것도 우스꽝스럽고, 부조리를 감추려고 또 다른 부조리가 행해지는 것을 목도할 때면 정말이지 어이가 없지. 생각해봐. 웃음의 차원도 여러 가지잖아. 배꼽을 잡고 뒹굴뒹굴 구를 때도 있고 어처구니없어서 피식 웃고 마는 경우도 있으니까. 웃음을 유발한다고 해서 그게 가벼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 형 말처럼 그 안에는 무기력함과 쓸쓸함, 공허함 같은 것이 다 담겨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쓸쓸하면서 우습고, 한없이 밝으면서 뒤꽁무니에는 거무스름한 그림자를 길게 달고 다니는 셈이지. 말하고 보니, 시를 쓸 때 딱 저런 상태인 것 같아.

 

이재훈 : 최근 시를 보면 점점 더 의미가 강화된다는 느낌이다. 「우리 학원」이나 「맥거핀」,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 「다움」 등에서 보이는 사회성이나 존재에 대한 풍자가 더 깊어진 것 같다. 「반의반」에서처럼 말놀이의 재기는 여전하고.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은가.

 

오은 : 딱 봤을 때, “이거 오은 시네!”라고 말할 수 있는 시. 나는 나의 시를 쓰고 싶어. 나만 쓸 수 있는 시. 내가 들어가 있는 시. 내가 아무리 내가 아닌 척 노력해도 종국에는 오은인 걸 들키고 마는 시를.

 

이재훈 : 우문이지만 현답이었다. 인터뷰 하느라 고생 많았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은 : 응 형. 나도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어.

 


 

오은 :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및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로봇과 서사를 다룬 책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 그리고 색과 그림을 다룬 책 <너랑 나랑 노랑>을 썼다. 현재 작란(作亂)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이재훈 : 1972년 강원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저서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 <부재의 수사학>,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가 있다. <현대시작품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_ <시향>, 2014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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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이 몽해와 들길을 소요하는 석자(錫子)

 

 

 

대담 : 장석주 이재훈

 

 

 

 

 

 

 

2013년 5월 5일. 어린이날.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장석주 시인의 <수졸재>를 찾았다. 금광저수지를 앞에 두고 책과 음악과 시가 있는 문학의 성채를 온몸으로 느꼈다. <일상의 인문학>에 나오는 약력을 보면 시인은 자신을 가리켜 ‘문장 노동자’라고 칭한다. 문장 노동자라니. 눈을 감고 깊은 세계에 빠져들고 있는 시인의 프로필 사진에서 문장가로서의 고독한 고뇌와 자부심 같은 것들이 함께 느껴졌다. 시인은 뇌의 모든 부분이 읽고 쓰는 데 최적화된 것 같다고 했다. 마치 김연아 선수의 뇌가 피겨스케이팅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듯이. 안성으로 내려와 <월든>을 집필한 숲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처럼 그 스스로 나무가 되고 풀이 되고 숲이 되는 시간들을 견뎌 마침 ‘석자(錫子)’라는 별칭을 얻게 된 내력을 어떻게 들여다봐야 할까.

이제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시인은 제주도에 새로운 집필실과 <여행자 도서관>을 만드는 게 꿈이라 했다. 이미 땅을 사 놓았고, 설계할 건축가도 있다고 했다. 몇 년 뒤 그 건축물이 지어지면 노년은 제주도에서 보낼 계획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바람 냄새를 온몸에 가득 담은 채 제주도의 <여행자 도서관>에 닿아 시인과 만나는 상상을 했다. 대담 후 우리는 중앙대 안성캠퍼스 후문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카레라이스와 돈가스를 먹었다. 그곳은 이해선 사진작가가 운영하는 <셰므아>. 사진작가가 시인을 위해 직접 내놓은 레드와인도 한잔씩 했다. 일요일 오후, 시인들의 이야기처럼 와인도 진하게 폭 익어 있었다.

 

이재훈 : 선생님 안녕하세요. 시집 <오랫동안>으로 받으신 11회 영랑시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몇 년 전에 제1회 질마재문학상을 받으셨지요. 그 시상식에 저도 갔었는데요. 시인으로 받는 첫 상이라는 수상소감이 남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이번 상은 또 다른 느낌이셨을 텐데요. 감회를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첫 번째로 받은 질마재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얼떨떨했어요. 문학상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번 영랑시문학상 수상 소식은 순수하게 기뻤어요. 무엇보다도 심사위원인 김남조 선생님이나 고은 선생님 같은 대선배시인들의 따뜻한 격려 같은 게 느껴졌어요. 상이란 건 즐거운 해프닝이라고 생각해요. 항상 당대 최고의 작품들이 문학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최고’라는 합의 역시 심사위원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테니까요. 수상자의 문학적 성취에 대한 판단은 엄연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재는 객관적 잣대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심사자의 주관적 정념이 객관성을 뒤집는 경우가 잦아지는 탓에 문학상이 결정되는 그 이면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그 복잡함을 이루는 요소는 문학‘성’과 심사위원들의 취향, 우연의 작동, 연륜과 인연의 그물들 같은 것들이겠죠.

 

이재훈 : 토지문화관에서 집필을 하시다가 어제 수졸재로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근황이 궁금합니다.

 

장석주 : 4월 1일부터 5월말까지 원주의 토지문화관 입주작가로서 글을 쓰고 있어요. 올해 말까지 내야 할 책들, 새로운 시집 등을 준비하고 있고요. 토지문화관을 나오면 6월 하순에서 7월 중순까지 터키와 그리스 여행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MBC 네트워크의 ‘장석주의 지중해 인문학 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기 때문인데요. 프로듀서와 촬영감독 등 6명 정도가 함께 여행할 예정입니다. 에게해 중심으로 이스탄불, 카잔차키스의 무덤이 있는 크레타 섬까지 돌아볼 겁니다. 에게해 문명과 신화, 역사,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프로그램이에요. 올해 일정은 모두 다 잡혀 있는 상태죠.

지난주에는 <철학자의 사물들>이라는 신간이 나왔고요. 5월에 <동물원과 유토피아>라는 철학적 사회비판 책이 나올 예정이구요. 그리스를 다녀오면 7, 8월 중에 다시 2권의 저서가 출간 예정이고 하반기에 4권 정도가 더 나올 예정이어서 올해만 8권 정도가 출간되겠지요. 지금이 내 인생에서 생산력이 가장 왕성할 때인 것 같네요. 20년 전에는 내가 죽을 때까지 50~60권 정도 쓸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벌써 70여권을 썼으니까요.

 

이재훈 : 선생님의 생산력에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 생산력을 지탱하는 일상들이 궁금합니다. 최근 발표하신 시 「큰 찰나」는 곤궁한 기억의 추체험을 통한 찰나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제가 곤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실상 그때의 시간은 오히려 순일한 시간으로 표현됩니다. “튀긴 두부 두 모를 삼키던 추분”, “두드려 펼친 북어 한 쾌를 끓이던 상강”, “삶은 고등어 한 손에 찬밥을 먹던 중양절”의 시간들은 지금 선생님께서 바라보는 지향점을 은근히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평론가 조강석은 이를 ‘마음의 섭생’으로 풀었더군요. 큰 찰나의 순간은 잡다한 일상들이 모두 거세되고 남는 단순함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지요. 산책과 독서, 집필로 대표되는 선생님의 순일한 일상은 어떠신지요?

 

장석주 : 튀긴 두부, 북엇국, 고등어조림은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입니다. 최근에 읽은 장-뤽 낭시의 책에 “먹는 것은 먹은 것을 몸으로 합병하는 행위가 아니라 몸을 제가 삼킨 것을 향해 여는 것, ‘안’을 가령 생선이나 무화과의 맛으로 발산하는 행위”라고 했더군요. 음식을 먹고 삼키는 행위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을 몸으로 ‘합병’하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향해 내 몸을 여는 것, ‘안’을 그 매개물에 의지해서 그것의 맛으로 저를 ‘발산’하는 행위라는 것이죠. 미각의 만족감이 삶의 행복과 연결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먹고 마셔라! 그리하면 행복해질 것이니! 몸은 마음의 외부가 아니고, 따라서 마음은 몸의 내부가 아닙니다. 다만 몸의 자명함에 견줘서 마음은 자명하지 않습니다만 몸의 섭생과 마음의 섭생이 그리 멀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에피쿠로스라는 고대 철학자의 철학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요. 추분, 상강, 중양절은 몸을 제약하는 시간의 분절들이지만, 역시 마음의 현동을 제약하기도 하겠지요. 제 일상은 대체로 단순해요. 새벽에 일어나 신문과 인터넷을 보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해요. 날마다 쓰고, 날마다 이러저러한 책들을 읽습니다. 오후에는 산책을 하고, 단골 찻집에 들러 즐기는 차를 마십니다.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고, 그것을 즐기는 편입니다.

 

이재훈 : 경기도 안성의 수졸재(守拙齋)의 ‘수졸’이 “재주와 기교가 뛰어난 사람이 이를 감추고 소박하고 투박하게 사는 것을 말하며,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을 말한다”(장인수)고 합니다. 많은 문인들은 부러워하기도 하죠. 하지만 조용한 곳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시가 더 안 나오더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수졸재로 터전을 옮길 당시 마음과 계획 같은 것들이 있었을텐데요. 그런 마음과 계획들이 문학적으로 잘 실천되고 있는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안성으로 내려갈 때는 몸도, 마음도, 돈도 다 거덜나버린 상태에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었어요. 생계를 걱정하고, 미래의 불안을 견뎌야 했지요. 게다가 딱히 대상이 없는 분노 같은 게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러다 죽겠다는 자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도 마음을 다독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어요. 그래서 노자와 장자를 무작정 읽었어요. 그리고 안성의 들길과 산길들을 찾아 걸었어요. 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다, 다만 잠정적으로 ‘점유’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억지로 쥐고 있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이어졌지요. 욕심과 욕망은 내 몸과 마음이 내 소유라는 확신 속에서 번성하는 겁니다. 벌써 안성 생활이 13년째 이어지고 있는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자기 위로의 시간들을 보내고, 덕분에 창작의 활화산 같은 시간들을 맞고 있는 느낌입니다. 씩씩하게 책들을 써서 밥벌이를 하고 있고, 메말랐던 감성도 충만해졌어요.

 

이재훈 : 위의 질문과 더불어 최근 관심가지고 계시는 노장에 대한 깊은 관심은 일상과 산책자의 관조 사이에서 체화된 것은 아닌지요?

 

장석주 : 노자와 장자 읽기는 안성에 정착하면서 우연으로 시작한 것이지만,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떤 필연성이 있었어요. 우선 노자와 장자를 읽을 수 있는 자유가 조건 없이 풍성하게 주어졌다는 점이지요. 안성에서의 첫 시작은 백수 노릇이었으니까요. 그랬으니 노자와 장자를 100번 이상씩 읽어낼 수 있었어요. 물론 지금도 노자와 장자의 그 심오한 철학을 다 이해하고 체화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노자> 1장에 나오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은 아직도 제 화두예요. 가끔씩 이 화두를 붙잡지만 안성에 내려와 살면서 제 심성이 너그러워진 부분이 있다면 이건 그 두 현자의 힘이 크겠지요. 인생에 대한 긍정과 여유, 넉넉한 관조적 시선,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게 했으니까요.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덜어내니까, 인생이 훨씬 더 살만한 것으로 다가오더군요. 삶을 가능한 한 단순화시키면서 책읽기와 명상, 들길이나 산길 걷기에 집중했기 때문에 지난 13년간 그 많은 책들을 읽어내고, 지치지 않고 서른 권이 넘는 책들을 써낼 수 있었지요.

 

이재훈 : 연보를 보면 유년 시절 충남 논산 외가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사셨지요. 그 후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선생님의 전체적인 스타일 ―문학적 양식까지 포함해서―은 도시풍의 세련됨입니다. 하지만 10여년 정도를 보낸 유년 시절은 또 다른 선생님의 문학적 토대일지도 모릅니다. 유년 시절의 원체험이 선생님의 문학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궁금합니다.

 

장석주 : 네, 맞습니다. 10살 무렵까지 논산의 외가에서 자랐어요. 제가 태어난 곳은 한반도의 전형적인 농촌 취락 형태로 발생한 마을이었어요. 다들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지요. 언덕을 넘으면 논으로 이루어진 평평한 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곳인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을 처음 봤을 때 현기증이랄까, 알 수 없는 공포감 같은 걸 느꼈어요. 외삼촌들을 따라 그 들로 나갔는데 논과 수로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더군요. 시선의 경이랄까요, 그 엄청난 유년기의 자연체험은 무의식에 새겨진 원체험이지요. 그 뒤 서울로 올라와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며 40여년을 살지만, 그 원체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제 안에는 유년기의 긍정적인 자연체험과 성장기의 부정적인 도시체험이 함께 들어 있어요. 그 둘은 융합하지 않고 서로 불화하며 겉돕니다. 제 의식은 그 ‘사이’에서 분열과 상처를 끌어안고 있지요. 아마 제 가장 중요한 시적 상상력은 그 ‘사이’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재훈 : 중학교 때부터 당시의 청년문단인 <학원>지에 시를 발표하고 학교에서도 책만 읽었던 외톨이였다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교련수업 거부 사건으로 제도적 교육과의 자발적 결별을 선택하게 되는데요. 지금 들어보면 상당히 주체적이고 조숙한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책으로서만 세계와 소통하던 20대 초반까지의 시간들이 천재적인 문학가가 되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을 텐데요. 그 고독한 시간들 이면에 다른 회한이나 후회 같은 것들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학원>지에 중학교 2학년 때 첫 투고한 시가 고은 시인이 뽑아 활자화 되었어요. 그때는 고은 시인이 누구인지도 모를 때였습니다. 어쨌든 그게 크게 자극이 되었어요. 7, 8편의 시들을 연속으로 발표하고, 이듬해 학원문학상에서 우수작 1석으로 뽑혔어요. 그 뒤로 고등학교에 와서는 또 단편소설을 써서 투고했는데, 소설가 임옥인 선생이 선을 해서 활자화되었고요. 그러면서 전국의 문학소년들 사이에 이름이 나고 그들과 편지를 주고받읍며 교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시절에 주변에 저를 이끌어줄 만한 스승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지요. 혼자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제 길은 스스로 찾아야만 했어요. 이 모든 일들이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어요. 제도 교육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한 것은 나중에 더 자세하게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진 거예요. 동년배의 다른 친구들이 다들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할 때 저는 무적자(無籍者)가 되어 방황을 하거나 몇 년간을 시립도서관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요. 결국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쓴 시와 평론이 1970년대의 마지막 해에 두 군데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문단에 나오고, 그게 연줄이 되어 출판사 편집부에 입사했지요. 아주 가끔 그때 혼자 외롭게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문학이나 철학 책들을 읽는 대신에, 대학에 가서 자연과학 쪽 공부를 했으면 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고 생각해 볼 때도 있습니다. 아마 그랬다면 삶은 지금과는 크게 달라졌겠지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여유도 없었고, 삶과 세계를 꿰뚫어보는 지적 능력이나 균형잡힌 ‘인지적 자각’같은 게 없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20대 초반에 이미 문학을 숙명으로 수락하고 고분고분 받아들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이재훈 : 선생님의 젊음을 가리켜 “고독과 가난, 주체할 수 없는 청춘이라는 이름의 70년대”(김태형)라고 표현했던데요. 당시는 사회참여 민중시의 시대였지 않습니까. 또 다른 대척점에는 실험시가 있었을텐데, 이도 상당히 정치적인 측면이 있죠. 당시 시문학사에서 선생님께서는 이쪽과 저쪽도 아닌 미학주의자로서 독자적인 길 쪽에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바로 밑 선생님의 후배들로부터 바슐라르에 영향받은 미학주의자들이 시단에 나타났구요. 당시 선생님의 문학적 지향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제 20대는 고독과 가난을 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그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겁니다. 그 결핍이 있었기에 문학과 음악에 대한 강렬한 열망 같은 걸 품게 된 게 아닐까요? 20대 초반 시립도서관에서 책만 읽은 게 아니라 서울 광화문에 있던 ‘르네상스’나 명동에 있던 ‘필하모니’, ‘전원’, ‘티롤’ 같은 고전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제 초기시의 미학주의적 성향은 서양 고전음악들을 접하며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이재훈 : 선생님의 청년 독서목록에는 헤세, 카프카, 사르트르, 카뮈, 니체, 바슐라르 등의 이름이 열거됩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당시 철학과 인문학의 거센 광풍은 지금보다 훨씬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독서가 추후 양서를 출판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겠죠. 지금 선생님의 사유체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나 철학자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장석주 : 10대 후반에 한국문학전집들을 독파하고 헤르만 헤세, 알베르 카뮈, 카프카, 헤밍웨이와 같은 널리 알려진 서구 작가들,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와 같은 일본작가들의 소설들을 남독하며 보냈다면, 20대 초반에는 시립도서관의 참고열람실에서 보내면서 서양 철학자들의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게 니체와 바슐라르였어요. 일종의 황홀경 같은 걸 느끼면서 그 책들을 읽었거든요. 그리고 김현과 김우창 선생의 책들을 읽으면서 내 공부가 얼마나 하찮은가를 깨달으며 엄청난 지적 자극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 초기 지적 자양분은 전적으로 이 분들에게서 얻은 것들입니다. ‘고려원’에 막 입사해서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인 <영혼의 자서전>의 교정을 봤는데요, 작가의 방대한 지적 편련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국내에 소개가 그다지 많이 되지 않은 생소한 작가였어요. <영혼의 자서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전집을 만들어보자고 출판사 사장에게 건의를 해서 그 전집이 나오게 되었지요. 나중에 ‘고려원’ 편집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출판사를 차린 것은 ‘니체 전집’을 새로 번역해서 내야 되겠다는 결심 때문이었어요. 일종의 보은(報恩)이었던 것이지요.

 

이재훈 : 선생님의 연보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1991, 청하) 사건입니다. 당시 이 일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권력의 개입이 전 국민에게 전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외설스런 내용의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저자를 구속한 세계 최초의 사례였다고 평가하는데요. 이 사건으로 출판 책임자로써 선생님께서도 징역형을 선고받으셨죠. 이 일로 선생님께서 출판에 대한 뜻을 접습니다. 아까운 일이었죠. 저 또한 지금까지 가장 아까운 출판사로 ‘청하’를 1순위로 꼽습니다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일로 우리는 시인이자 작가 ‘장석주’를 새롭게 얻습니다. 출판사가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왕성한 시인이자 집필자로서의 장석주를 얻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텐데요. 동의하시는지요?

 

장석주 : 마광수 선생의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은 참 어처구니도 없고 안타까운 일이지요. 제 인생에도 엄청난 타격이 된 ‘마이너스 체험’입니다. 그때 입은 내상(內傷) 같은 게 아직도 남아 있어요. 그 분노와 실망이 출판사를 접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출판사를 할 때 제 젊음 전체를 담보로 하는 것이었기에 치열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기획, 편집, 교정, 디자인, 영업 같은 걸 다 했었죠. 출판사가 커져서 직원이 20명, 30명으로 느니까, 출판 일과 무관한 ‘인력 관리’ 같은 게 필요해지더라구요. 그런 일들에 내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는 게 싫었어요. 필화사건을 계기로 출판사를 접고자 결단했을 때, 한편으로, 이젠 내 길을 가자, 이런 생각도 있었어요. 결국 내 길이란 내 문학, 내 글쓰기지요. 이건 일종의 역설이겠지만, 사실 출판사를 경영할 때 책을 가장 못 읽었어요. 출판사를 그만 두고 난 뒤, 출판사를 경영할 때보다 10배는 더 책을 읽게 되더군요. 이것만 보더라도 출판사를 그 시점에서 접은 것은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재훈 : 선생님의 시집은 14권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외 2권의 시선집을 내셨구요. 끊임없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시집 <햇빛사냥>(1979) 이후 몇 년 간의 터울로 계속해서 시집을 발간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집뿐 아니라, 평론 에세이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활발히 창작하셨는데요. 그런 가운데에서 쉬지 않고 시집에 큰 에너지를 쏟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다른 장르 글쓰기와의 관계 하에서 시창작의 통과의례를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그 무렵은 한창 출판사가 커가고, 그에 따른 업무들이 팽창할 땐데, 그 시들을 어느 틈에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를 쓰는 건 일종의 숨쉬기 같은 게 아니었을까. 숨을 쉬지 않으면 죽으니까,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시를 썼던 거지요. 그 시절의 시에는 아쉬운 바가 있어요. 그 시절의 시들은 좋은 시가 품어야 할 긴 시간, 느릿한 숙성, 자애의 적요(寂寥) 같은 게 모자랍니다. 일하면서 짬짬이 짧은 시간을 들여 썼으니까요.

 

이재훈 : 선생님의 시세계를 크게 본다면 두 갈래의 변화지점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번째 시집인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2002, 그림같은세상)는 안성에 내려가셨을 때 쓴 시집인데요. 안성에 정착한 이후로 시세계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장석주 :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2002, 그림같은세상), <붉디붉은 호랑이>(2005, 애지), <절벽>(2007, 세계사)은 ‘안성 3부작’으로 꼽을 만한 시집들입니다. 안성의 물, 바람, 흙이 들어 있고, 제가 먹은 밥과 젊은 벗들, 밤과 고독들이 고스란히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전의 시집들에 있던 도시적 메마른 감성 대신에 그늘과 여린 것들에 대한 자애, 자연의 관능성에서 연유된 활발함이 눈에 띄는데, 이것들은 제 안의 촉기가 풍성해진 결과일 겁니다. 김영랑 시인은 이 촉기를 두고 “같은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탁한 데 떨어지지 않고, 싱그러운 음색과 기름지고 생생한 기운”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런 뜻에서 그렇습니다. ‘안성 3부작’에 어떤 풍성함이 있다면 자연과 제 오감이 비벼지면서 얻어진 이 촉기 때문일 겁니다.

 

이재훈 : 좀 더 세분화해서 살펴본다면 네 번째 시집까지는 어둡고 절망적인 청춘의 열망이 고스란히 집약된 세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완전주의자의 꿈」을 보면 “채 끝내지 못한 교정지와/ 빈 책상들만 어둠 속에 남아 있을/ 사무실과 내가 방금 내려온 어두운 계단들이/ 내 뒤에 남겨져 있는 모든 것이다./ 나를 열기 위하여, 활짝 열려진 문처럼/ 혹은 나를 닫기 위하여, 쾅쾅 못질하여 닫아버린 문처럼/ 나는 일년을 살았다. 아니 일년을 죽었다.”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당시 세계를 절망적으로 보는 시선에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장석주 : <햇빛사냥>(1979, 고려원), <완전주의자의 꿈>(1981, 청하), <그리운 나라>(1984, 평민사), <새들은 황홀 속에 집을 짓는다>(1986, 나남)로 이어지는 초기 시편들은 청년의 순수한 자아 제일주의, 세계와 자아 사이의 찢김, 상처와 분열증, 관념주의의 우월성 따위가 두드러지지요.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지만. 체험의 직접성, 영감의 번뜩임, 광기 같은 건 희박했어요. 그저 소시민적 생활인의 옅은 비애와 메마름, 거기에 약간의 관념들이 섞여서 만들어진 세계지요.

 

이재훈 : 이후 중기의 시집들이라고 할 수 있는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1991, 문학과지성사),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1996, 문학과지성사),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1998, 세계사),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2001, 세계사) 등의 작품세계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됩니다. 쓸쓸하고 절망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여전하지만, 다양한 이미지의 변주와 시적 대상들을 통해 좀 더 활발해집니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시도가 있었던 때입니다. 사랑을 테마로 한 시집도 있었고, 이때부터 구체적 일상이 활발하게 드러납니다. “왜 생활은 완성되지 않는가/ 왜 생활은/ 미완성으로만 완성되는가/ 왜 생활은/ 미완성일 때 아름다운가”(「왜 생활은 완성되지 않는가」)라는 시적 전언들은 이를 잘 드러내줍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의 추억을 통한 사유도 마찬가지고요. 1990년대에는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미학적 담론들이 생성될 때인데요. 문학쪽에서 다양한 담론들이 새롭게 형성된 시기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이런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의식하셨는지요?

 

장석주 :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1991, 문학과지성사),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에는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서 끊임없이 타자와 자신에게 착취당하는 느낌이 불가피하게 침착되어 있지요. 자아의 궁핍함과 메마른 도시에서의 무의미함과 건조함이 격렬하게 표출되었던 시기였어요. 제대로 살려면 서울을 벗어나야하는 게 아닌가하는 강박적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숲이나 강과 같은 자연에 가까이 접하려는 열망이 있었죠. 서울 삶에 대한 진절머리 같은 것들이 나던 시기였고요. 끊임없이 가속화되는 속도 속에 갇히고 삶속에서 자아는 죽어버리고 노동기계가 되는 시간들을 견딘 거죠. 그 집단적 인식 안에 나도 속해 있었죠. 그러니까 당시에는 메마르고 어둡고 비극적인 정조의 시가 나왔어요.

좀 이색적인 시집이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인데요. 그 시집도 사실은 시를 통해 나락에 빠진 나를 필사적으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능동적 의지가 있었어요. 그 시집에 사랑시가 몇 편 있기는 하지만, 제목과는 달리 사랑 시집은 아니예요. 그 시집의 반 정도가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 화집을 보면서 떠올린 영감으로 쓴 시들이에요. 뭉크의 비극적인 삶과 내 삶이 겹쳐지죠. 그 시집에는 어떻게든 시를 붙들고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려는 몸부림, 자기 치유와 성찰, 상처와 슬픔과 모욕을 끝끝내 견뎌내려는 불굴의 의지 같은 것이 오롯합니다. 그 시들을 통해 생의 시련들을 견뎌냈어요. 2000년 여름 안성에 내려오면서 삶의 외관이나 내면의식, 감성이 커브를 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내 몸에 은닉된 도시의 자명성이 해체되고, 물, 나무, 안개, 새벽, 뱀, 너구리 따위의 자연 체험, 농약을 삼킨 개들의 죽음, 함께 놀아줄 귀신이라고 있었으면 하는 지독한 심심함, 소름끼치는 근본으로서의 고독 속에서 시가 나오니까, 그 전의 쓰던 시와는 전혀 다른 시세계가 만들어지더군요. 시골도 이미 지고지순은 아니예요. 밋밋한 시골의 삶에는 도시보다 더 끔찍한 지옥이 숨어 있어요. 그런 걸 시골에 와서 열세 해를 살면서 겪어낸 것이지요.

 

이재훈 : 안성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가 그 시집들에 담겨 있는 거네요. 도시에서의 삶에 대해 사유의 극점을 찍고 그 세계를 통과해야 새로운 세계로 입성할 수 있는 거니까 말이죠.

 

장석주 : 우리가 철학적인 어휘로 얘기를 나눴는데요. 사실은 돈이 없었어요.(모두 웃음) 제 재산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안성의 땅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죠. 안성에 살면서 초기 2년 동안은 참으로 고요했어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할 일도 없고. 2년이 지나니까 여성잡지사들 10여 군데에서 취재를 오고, EBS에서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찍어가고요. 말하자면 사람들은 시인이 호수가에 전원주택을 짓고 내려와 근사한 전원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게 당시 중산층들의 꿈이고 열망인데. 그것을 마치 내가 선점한 것처럼 비췄던 거겠죠. 여성잡지와 방송 매체를 타고 평이한 시골살림이 근사한 전원생활로 탈바꿈되어 소개되고 나니 여기저기서 원고청탁이 밀려들고, 대학에서는 강의 제안이 들어오고, 신문과 잡지에서는 연재를 하게 되었지요. 그 바람에 시골의 고요한 삶은 다 깨져버리고 서울에서보다 더 많이 바빠졌어요.

 

이재훈 : <절벽>(2007, 세계사) 이후의 작품들은 좀 더 인문학적, 혹은 철학적 사유가 내재화되어 드러난다고 봅니다. 가장 최근의 시집인 <오랫동안>(2012, 문예중앙)은 그 결실이 직접적으로 드러났다고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그 전 시집인 <몽해항로>(2012, 민음사)는 선생님의 전체적인 시세계 속에서 독특한 지점에서 빛이 나는 매력적인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몽해’라는 특별한 상징을 통해 내면의 사유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말이죠. 특히 상징을 통해 관념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내면의 여정이 더욱 미학적으로 완성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최근 작품들의 시가 발아하는 계기나 앞으로의 시작 향방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몽해항로>는 안성에 내려온 지 만 10년 되는 해에 나왔습니다. 안성 3부작이라고 불리는 세 시집을 낸 뒤 상상력의 중심이 안성에서 벗어나, 다시 죽음과 같은 사유와 상상력으로 회귀하더군요. 장소마다 장소의 목소리가 있는데, 이제 내 시에는 안성의 목소리가 잦아들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일부러 의식해서 쓴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안성하고는 결별하더라구요. 이재훈 시인이 잘 지적했듯이 초기의 내 시들은 죽음이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사유로 들어가니까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죠. 초기시의 관념과 지금의 관념성은 달라요. 초기시에는 체험이라는 거름망을 통과하지 않은, 책읽기를 통한 간접성에 연루된 형이상학이었다면 <몽해항로>에서 드러나는 관념성은 상당 부분 직접적이고 날 것인 체험과 연륜이 체화되고 육화된 것의 분출 같은 것이지요. 내 안에 있는 본래적인 것들의 목소리를 낸다고나 할까요. 평생 붙든 화두라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왜 태어났느냐, 왜 인간은 죽는가, 하는 형이상학적 것들인데, 그것이 깊이를 매개로 하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더라구요.

‘몽해’는 상징적인 시공이지요. ‘몽해항로’ 연작시들은 ‘몽해’라는 상상의 차가운 바다, 죽음이 무시로 출몰하는 그 가상의 시공을 통해서 존재의 유한성, 죽음에 대한 사유를 드러내는 시편들이었고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슬프니까, 시에도 슬픔과 애조가 깔려 있죠. 시에는 북풍이라든지, 차가운 바다라든지 털만 남기고 죽은 비둘기라든지 하는 죽음을 은유하는 이미지들이 많이 등장하죠. 그것이 의도적이기보다는 내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숙성된 사유와 상상력을 도약대 삼아 튀어 나온 것이죠. <몽해항로>를 기점으로 다시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을 나에게 던지고 있는 중이죠. 그와 함께 제 시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는 예감 같은 것도 하지요.

 

이재훈 : 시인, 소설가, 평론가, 출판인, 인문학자, 독서광이자 장서가, 대학교수, 방송인 등의 명명 중 가장 아쉬운 호칭이 있다면? 그 이유도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호칭은 외부에서 내게 붙여준 거니까 크게 의식을 안 하고요. 처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써야만 하는 생계형 글쓰기, 살아남기 위해 써야만 하는 생존형 글쓰기를 하고 있죠. 원고료나 인세를 받아 애들도 키우고, 쌀도 사고, 전기세도 내고, 의료보험도 내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게으름을 부릴 수가 없었어요. 시골에 내려올 때는 느긋하게 게으름을 좀 피울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는데, 그게 다 가망없는 희망이 되고 말았지요. 참 아이러니죠. 출판 편집, 기획자, 대학 강의, 방송 진행자, 자유기고가와 같은 다양한 경험을 한 것은 행운이죠. 나를 규정하는 여러 호칭들에서 그저 ‘시인’ 하나로 족합니다. 가장 애착이 가고요. 예술의 본질은 시가 선점하고 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삶의 물적 토대를 만들기 위해 편집자로서 출발하여 출판사 운영까지 가게 되었는데요, 그때는 정말 열심히 나를 던져 일을 했고요. 그 일에 대해서는 한 점의 회한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벌써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사람들이 물어봐요. 출판사를 하느냐, 고요. 혹은 출판 기획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것들이 까마득하게 먼 옛날 일 같은데. 가끔 내가 정말 출판 일을 하기는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죠. 그때는 최선을 다했고 인연이 다해서 출판 일에서 물러나왔을 때는 돌아보지 않았어요. 과거는 미래의 일로써만 의미가 있겠지요. 지금은 앞날과 미래의 삶이 더 중요하죠.

지금이 노년기의 초입인데, 인생 전체의 마무리에 대해 숙고할 단계가 왔다고 생각해요. 당장은 여러 출판사들과 계약된 책을 써내는 게 우선 중요하고요.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모두 성장해서 제 앞가림을 하니까 가족부양의 의무에서 좀 일찍 해방되어서 사는데 그렇게 큰돈이 필요치는 않다는 거요.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말년의 양식(樣式)’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합니다. 시와 철학을 오가며 사유하고 글을 써온 사람으로서 내 사유와 인식의 세계를 어떻게 총체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을까, 하는 양식(樣式)에 대한 고민이지요.

 

이재훈 : 최근에 <철학자의 사물들>이라는 신간을 출간하셨고 시집 포함해서 저서가 70여권이 있습니다. 많은 대중들에게 인문학적 사유나 지식을 교양서로 풀어내어 들려주는 작업들을 하고 계시는데요. 이런 집필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지식인으로 출판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시인이 쓰는 철학과 인문학의 글쓰기에는 어떤 자의식이 존재하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이런 글이 시와 어떤 연결 접점에서 서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전혀 다른 모드와 방식으로 생산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장석주 : 그렇지는 않아요. 20대 초반에 문학 계통의 책만 읽은 게 아니라 철학이나 미학 공부를 했어요. 그쪽 분야의 책을 나름대로 계통을 잡아서 읽었지요. 그 뒤로도 니체에서 들뢰즈로 이어지는 서양철학에 대한 독서를 꾸준히 해왔고요. 개별자로서 삶의 경험이 철학적 사유라든가 인식들과 만나고 섞이는 과정, 즉 융합을 통해 만들어진 사유의 영역이 시적 상상력과 만나는 바로 그 지점에 제 시의 자리가 생겨나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시와 철학적 사유가 따로 가는 게 아니라 상호호응하고, 상호삼투하지요. 철학, 미학, 예술에 관한 책들만이 아니라 분자생물학, 뇌과학, 양자물리학, 천문과학 같은 책들도 열심히 찾아 읽어요. 거기에 더해 건축, 요리, 축구, 야구와 같은 분야의 책들도 읽습니다. 이런 것은 다 새로운 지식들에서 제 시적 상상력의 동력을 구하기 위한 노력이지요.

인문학 주제에 대한 책쓰기는 계속되겠지요. 다행히 작년 연말에 낸 『일상의 인문학』과『마흔의 서재』가 독자 반응이 좋았어요. 지금도 인문학적 사유를 담은 교양서를 몇 권 준비하고 있는데요. 이런 것의 기초적 토대가 되는 게 독서입니다. 끊임없는 책읽기를 통해 어떤 사유의 극점까지 자신을 몰아가지요. 그런 끊임없는 책읽기를 통해 체화된 것들이 있기에 인문학적 주제에 대한 저술이 가능합니다. 책을 떠나서 ‘장석주’라는 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내 시, 내 삶, 그 바탕에는 내가 읽은 수많은 책들과 그것들에 의해 만들어진 내면의 확장이 있어요.

 

이재훈 : 요즘 생계형 글쓰기 때문에 바쁘시잖아요. 바둑이나 포커 등에 상당한 고수이시고 문단에서 즐겨하시면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요. 요즘은 많이 못하시겠어요.

 

장석주 : 다른 건 할 줄 모르고 바둑과 포커가 제가 할 줄 아는 잡기인데요. 요즘은 전혀 못하죠. 바둑은 어려서 배웠고요. 아마 3단 정도 실력이예요. 바둑 자체가 동양 철학의 집대성이예요. 그 안에 우주가 있고, 도가 있고,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가 다 녹아있어요. 바둑 둘 때는 지독하게 몰입합니다. 그 몰입이 좋은 거지요. 한때 시인 후배들하고 푼돈을 걸고 포커 게임을 즐겼는데, 온몸이 소진될 때까지 뭔가를 하고 난 뒤에 그 보상으로 뭔가에 몰입하는 기쁨 같은 것에 탐닉하는 거죠. 아주 유쾌한 탐닉이지요. 후배들 하고 게임을 할 때는 나름의 원칙이 있어요. 내가 따면 안 된다는 거예요.(웃음) 다 가난뱅이 시인들인데, 그들의 푼돈을 갈취하면 안되지요. 늘 얼마쯤 잃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며 즐겼는데. 이젠 그런 시간도 낼 수가 없어요. 술을 안마시니까, 벗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는 도락의 즐거움 같은 것도 없어요. 삶이 단순화되었어요. 내 자신의 사유에 집중하고 지속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단순화한 측면도 있죠. 대신에 혼자 고전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많이 해요. 혼자 걷는데 이게 자기 충족감이나 행복감을 주죠. 하이데거가 ‘들길’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나를 나에게 되돌려주는 시간, 사색의 능력을 풍성하게 일구는 호젓한 시간이 필요한 거죠.

 

이재훈 : 일요일 오후, 귀한 시간을 내주시고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많은 것을 담고 가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장석주 : 고생 많았어요. ‘수졸재’에는 6월 하순쯤이면 반딧불이가 나타나요. 반딧불이들이 어둔 수풀 위에서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며 군무를 추는 여름밤은 정말 근사해요. 그때 아이들 데리고 함께 놀러 와요. 

 

 

출전 : <열린시학>, 2013년 여름호.

 

 

이재훈 | 1972년 강원도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저서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 <부재의 수사학>,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가 있다.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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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피는 추억, 그 보폭을 따라서

 

이재무, 이재훈

 

 

늦잠 자던 가로등/투덜대며 눈을 뜨고/건넛집 옥상 위/개운하게 팔다리를 흔들며/옥수수 잎새/낮 동안 이고 있던 햇살을 턴다/놀이에 지친 아이들 잠들고/한강을 건너온 달빛/젖은 얼굴로/불 꺼진 창들만 골라/기웃거리다 안간힘으로 구름을 밀며/바람이 불고/일터에서 돌아오는 남도의 사투리들/거리를 가득 메운다/하나둘 창마다 불이 켜지고/소스라쳐 빨개진 얼굴로/달빛 뒷걸음친다/비로소 가는 비 맞은 풀잎처럼/생기가 돈다, 마포 산동네
― <마포 산동네> 전문

가로등이 늦잠을 자고 옥수수 잎새가 옥상 위에서 햇살을 턴다. 한강을 건너온 달빛은 창들을 기웃거리다 구름을 밀고 창에 불이 켜지자 뒷걸음친다. 이 시는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화 같은 느낌을 준다. 정물적인 풍경이 아니라 살아 꿈틀거리는 풍경이다. 이 살아 꿈틀거리는 풍경 속에 사람이 있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풍경 속에 참여했을 때 마포의 산동네는 비로소 생기가 돈다. 마포 산동네를 생기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긍정적인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을 의인화시키는 방법론이다. 이것이 서로 엮어져 피로와 애환의 사연이 가득한 마포 산동네는 숨을 쉰다.
이렇듯 이재무 시인의 시에는 의인관적 세계관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직접적인 시적 대상이 되는 소재뿐만 아니라 관념까지도 의인화의 그물이 드리워진다. 세계와 한 몸이 되는 이 방법론은 시인이 천부적으로 가진 감수성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대담을 하면서 시인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의인법을 통해 들려준다. 나도 산골마을에서 지냈던 추억을 떠올리며 그 시간의 너머로 함께 빠져든다.
시인을 만나는 날은 봄비가 내렸다. 가물었던 땅이 숨을 쉴 소중한 비였다. 비가 내리는 찻집의 창가에서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래의 대담은 이재무 시인의 초기시부터 지금까지의 시적 역정과 삶의 역정이 같은 보폭으로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소상하게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이재훈: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시창작 강의를 많이 하시던데 요즘은 어디에서 강의를 하십니까. 인터넷 온라인 상에서도 강의를 하시던데요. 소개 좀 해 주세요.

이재무:온라인 상으로 하는 강의는 디지털예술아카데미(Art & Study)라고 해서 국가에서 지원하는 사단법인입니다. 신경림, 김지하 선생이 관여하고 있고 주요 강사로는 소설가이자 신화학자인 이윤기, 소설은 박범신, 최인석, 시는 임동확, 강형철 시인과 함께 맡고 있습니다. 온라인 강의는 굉장한 노동력을 필요로 합니다. 수강생들마다 하나씩 시평을 달아줘야 하니까요. 지금은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상태입니다.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토론하고 의욕적으로 공부하기 때문에 좋습니다. 오프라인에서도 가끔씩 만나고 그렇습니다. 지금 대학에서는 세 군데 정도 시창작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초기시의 경우 구체적인 삶의 경험에 기대어 있습니다. 고향인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난한 유년의 추억이 구체적인 체험과 함께 시로 형상화되어 있는데요. 시의 소재를 봐도 농촌에서 볼 수 있는 꽃이거나 작은 동물이거나 혹은 가족사거나 농촌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자연과 친화해 온 시인의 경험이 시적 대상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그 구체적인 농촌 체험의 정서는 기쁨에 대한 애정보다는 슬픔과 회한의 정서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유년 시절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재무:지금까지의 제 시를 이야기한다면 통상적으로 3단계에 걸쳐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5권의 시집이 있는데요. 초기시 [섣달그믐]부터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벌초]까지가 고향 유년 체험과 가난의 울분과 설움을 시의 질료로 많이 삼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유년을 보냈던 곳이 산간마을이어서 자연적 소재가 많이 차용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에는 그것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기억은 언제나 굴절되게 마련인데 그 굴절이 바로 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 볼 때 자연은 제게 생의 아버지였던 것 같아요. 비유의 어머니였기도 했구요. 자연에게 참 많은 것을 배웁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제가 초등학교 때 일인데요. 그때 아이들에게 유일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 근처 저수지였습니다. 저수지 갈 때 소쿠리를 가져가요. 소쿠리에다가 된장주머니를 넣고 갈참나무 가지를 소쿠리 위에 얼키설키 엮어 놓습니다. 그리고 새끼줄을 묶어서 저수지 가장자리에 담궈 놓지요. 미역을 감고 나서 배가 출출해지면 건져올립니다. 그러면 민물새우들이 새까맣게 몰려 있습니다. 그것을 주전자에 담아 오지요. 오면서 남의 집 담장 애호박을 꼭지를 비틀어서 땁니다. 일종의 도둑질이죠.(웃음) 집에 들어서면 뜰방에서 어머니가 저녁준비를 하시다가 제 모습을 보고 욕을 하십니다. 남의 집 물건을 훔쳐오면 어떡하냐고요. 그런데 어머니 표정이 무척 밝습니다. 저녁 식사 때 제가 잡아온 민물새우가 특찬이 돼요. 마당 멍석에서 저녁을 먹는데 반찬이라고 해봐야 김치 일색이죠. 유일한 특찬이 된장넣어 끓인 민물새우입니다. 그곳에 가만히 보면 천상의 많은 존재들이 다녀갑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능선을 타고 기어가는 초승달이 물김치에다 팔을 뻗기도 하고 저녁 무렵 뽕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개구리 울음도 반찬 속에 뛰어들어요. 풀벌레 울음소리는 반쯤 허물어진 담장을 넘어뜨리며 달려와서 냉수 사발을 들이킵니다. 이런 반찬을 먹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주의 반찬입니다. 이런 식사를 시로 쓴 일이 있습니다. <위대한 식사>라고. 도회지 생활이라는 게 가축생활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 구성원들조차도 함께 식사하기가 힘들 만큼 다른 시간대를 살게 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린 시절의 저녁만찬이 그리운 추억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민물새우도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다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바친 것 아닙니까. 그것을 보면 게이트 사건도 생각나구요. 생리면에서 다를 바 없지요.(웃음) 그런 게 자연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겁니다. 삶의 지혜와 원리를 가르치는 거죠.

이재훈:개인적으로는 시집 [몸에 피는 꽃]을 아주 감동적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 시집도 앞의 시집과 마찬가지로 농촌이 배경이 되는 시들도 있지만 도시생활에서 느낀 정서가 주된 시들도 많습니다. 이 시집의 자서에서 “추상화된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은 아름답지만 그것에는 자기기만과 자기연민의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지난날 나의 시는 이러한 함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일면이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이 겨울, 내 몸의 묵은 가지에/새잎 돋는 아픔”(<삶>)과 비슷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시적 변환의 이유 같은 것.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왔을 때의 새로운 정서 혹은 괴로움 같은 것들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재무:[몸에 피는 꽃]은 서울상경 10년 이후에 씌어진 시들이거든요. 제 시의 체질은 시의 보폭과 삶의 보폭이 같이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가증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시인들의 허위의식입니다. 시인들이 자기 삶에 비해서 과장되게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 면에서 제게 가장 교훈으로 다가오는 시인이 김수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수영은 그 어떤 시인보다도 자기의 허위의식과 치열하게 싸웠던 시인 중의 하나인데요. 자기의 치부도 과감하게 드러내는 결단과 용기가 있었지요. 요즘 많은 시인들이 생태시를 씁니다. 생태시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지나치게 과장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길 모티브가 많고 너도나도 득도한 도인들이 많다는 겁니다. 일종의 포즈죠. 그것이 허위의식이 아닐까요. 자기가 깨달은 것 이상으로 얘기를 하거든요. [몸에 피는 꽃]은 도시생활을 하면서도 느낀 정서를 담아낸 시집입니다. 도시생활이 주는 염증, 우울, 불안, 소외감, 타자와의 소통 장애 등이 시의 모티브로 등장을 한 것이지요. 아까 이 시인이 말씀하신 것처럼 제 시에 의인관적 세계관이 많이 등장한다고 했죠. 의인관적 세계관이란 것이 근대 이전의 주술적 세계관입니다. 애니미즘 사상인데요. 그것이 근대적 합리주의와 계몽이성논리에 의해서 배제됐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애니미즘 사상이 시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죠. 바람직한 것이죠. 제가 서울에 살면서 초기에 보였던 시경향을 말하는 것은 자기기만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자신의 허위의식에 빠지지 말자. 내 삶의 토대는 도시공간이기에 여기서 겪는 이야기를 쓰고자 한 것이지요. 제가 [삶의 문학] 동인이었지 않습니까. 제 삶과 같이 시가 간 것이죠.

이재훈:생태주의가 아직까지 주류적 담론이고 평단에서도 많은 평가와 비판이 있었습니다. 생태학은 다 함께 공생하자는 보편성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은 질서로 세계를 지탱해 온 인류의 이기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질서를 지키는 쪽에 있는 것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깨부수는 쪽에 더 많이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런 몸짓을 통해 기존 질서를 올바른 방향으로 갱생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지요. 지금의 생태주의가 공동체적 대안을 말하고자 하는데요. 저는 시 속에서 대안을 말하는 방식이 한 개인의 실존을 통해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재무: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근원적 생태주의를 부정합니다. 그것은 실현가능성이 없어요.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당장에 자동차를 버릴 수 있습니까. 지금 현재 아파트를 버릴 수는 없죠. 현실가능성이 있는 생태주의를 지향하자는 것이죠. 이분법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과 자연의 분리된 세계관이 사실 인간의 제불평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녀의 불평등, 신분의 불평등, 지역의 갈등, 남북의 갈등 등이 결국 확대된 것이 인간과 자연의 불평등으로 간 것입니다. 인간의 제불평등을 도외시하고 그 초점을 자연에게만 맞춘다면 그건 하나의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죠. 그래서 머레이 북친의 사회주의 생태학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실 가능한 생태주의를 주장한 것이죠. 또한 지금의 생태주의가 자본가들이 상업논리로 차용하고 이용하는 것도 눈여겨 봐야 할 겁니다. 신문이나 TV광고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죠. 녹색을 강조하면서 그 이미지를 통해서 자신의 상품을 무의식적으로 광고하는 것인데요. 생태주의도 그 안에 있는 함정과 모순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재훈:서울에 올라온 후 실제적 삶의 상황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시와 삶의 보폭이 함께 가니까 독자들이 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이재무:제가 처음에 서울에서 출판사에 취직을 한 것은 8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강남에 있는 출판사 어문각이란 곳인데 거기서 오래 못 있고 나왔습니다. 또 사실 독자들이 대부분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제가 대학시절에 필화사건을 겪었습니다. 민중교육지 사건이라고. 대학 3학년때 학생 신분으로 글을 썼거든요. 그 당시 민중교육지에 글을 쓴 사람들은 대개 전교조로 갔죠. 그래서 당시 불운하게도 나는 블랙리스트에 올랐어요. 그래서 교사자격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되는 게 어려웠습니다. 교사되는 게 꿈이었는데 하는 수 없이 궤도수정을 한 것이죠. 다음에 지방에 내려가 있다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간사 제의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요. 올라와서 마포 산동네에 살림을 꾸렸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울살이가 시작된 거죠. 작가회의 그만두고 청사출판사 편집장으로 있다가 정민사에서 주간을 맡고 그러다가 결혼하고 첫애를 낳았습니다. 그때 다시 실업자 생활에 들어갔는데 단칸 지하셋방에 살 때거든요. 생활이 많이 어려워서 고통스러웠을 땐데 입시학원에서 제의가 왔지요. 꽤 큰 학원 종합반에서 일했는데 수입이 좀 되니까 그때부터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렇게 만 5년 넘게 학원강사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늘 괴로웠습니다. 마음은 시단에 가 있었거든요. 그때 사이드 인생이 시작된 거죠. 학원에 있으면 시인 취급을 당하고 시단에 나오면 학원강사 취급을 하니까 고통스럽더라구요. 또 청탁도 많이 끊어졌었고 시단으로부터 많이 잊혀졌지요. 그래도 제가 그나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학원강사 시절에도 시집을 꾸준히 발간했다는 점입니다. 그 시절에 [벌초], [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까지 내고 나서 존재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러다가는 내가 물질적으로는 윤택한 생활을 할지 모르겠지만 시인으로서의 생은 접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강사생활을 그만두었는데요. 학원강사를 그만두는 것은 마치 마약을 끊는 것처럼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었으니까요. 그렇게 학원강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입학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 다시 시단으로 돌아와 열심히 시를 쓰고 있는 건데요. 다시 처음의 심정으로 시를 쓰고 있습니다.

이재훈:지난 연대 시에서 보이는 농촌이 변질되어가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보여졌다면 지금의 농촌은 문명시대의 대안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구체적 체험으로부터 촉발되어 모든 정서들이 용해되어 나온 시입니다. 그 체험에는 가난과 한 개인의 가족사와 농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한 개인이기도 하지만 지난 세대 우리들로 볼 수도 있거든요. 공감의 차원에서 말이죠. 신경림 선생의 시적 위상이 이런 곳에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그러니까 한 개인, 혹은 자아의 경험을 통해서 시대의 아픔이나 사회의 모순까지 즉 보편적인 자리까지 확대되어지는 걸 말하지요. 선생님의 시는 이런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온당할 듯싶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런 지난 세대의 체험 가지고는 공감이 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은 살로 부대끼어 할 수 있는 체험보다는 보다 간접적인 체험일 것입니다. 그 체험은 더 관념적이 되겠죠. 이 시대에서 농촌을 통해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이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재무:제 시 중에 <가재잡기>란 시가 있습니다. 저는 늘 자연에 가더라도 생활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 아들을 데리고 고향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누리던 자연체험을 보여주기 위해서지요. 거기에 같은 또래의 외사촌들이 살아서 쉽게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죠, 그런데 그들도 컴퓨터에 중독이 되어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반협박과 회유를 해서 놀러를 갔죠. 산골짜기에 가서 자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저보다 시력이 나쁘거든요. 안경도 쓰고요. 시력이 저보다 나쁜데도 가재를 저보다 잘 잡더란 말입니다. 제 눈에는 가재가 잘 안 띄는데 아들은 연방 가재잡았다고 탄성을 지릅니다. 혼자 생각을 해봤습니다. 가재잡기는 시력과 상관이 없는 것 같다구요. 아이가 저보다 생활의 때가 덜 묻은 겁니다. 가재는 일급수에 살지 않습니까. 아이는 때가 덜 묻어서 일급수에 가깝고 저는 4, 5급수에 해당되지 않을까요.(웃음) 그러니 가재가 눈에 안 띄는 거죠. 비록 우리가 농촌이나 자연을 떠나 살지만 과거 그 시절의 온정이나 넉넉함을 잃지 않고 도시문명 속에서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몸으로 살아내지 못할지라도 자연의 일부로 살았던 그때의 그 넉넉한 심성을 되살려 각박한 오늘의 현실을 살아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들을 데리고 자연학습을 실행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재훈:체험과 경험의 차원에서 현재는 존재론적인 차원으로 시가 변모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즉 이전의 시에서 보이는 사물들이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관계되어졌다면 지금의 사물들은 깊은 관조를 통해 그 사물의 본질을 탐색하려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선생님의 시적 방향에 대해 짤막하게 말씀해 주시죠.

이재무:제가 [시간의 그물] 자서에 짤막하게 언급을 했습니다만, 80년대에 제가 적으로 규정했던 것들은 모두 외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자신을 돌아보니 제가 적으로 규정했던 모든 성격들이 제 내부에 다 들어와 있는 겁니다. 김수영 시인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만, 적이라는 것은 잘 보이지도 않고 부드럽기조차도 하고 때론 친구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80년대 거대담론 속에서는 적이 외부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싸우기 더 편리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적에 대해서 강렬한 분노였으면 됐으니까요. 문제는 오늘의 적들의 성격이 이전의 적들에 비해 성격도 불분명하고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더더구나 적들의 전술방식이 교묘하고 다양화되고 중층화되어서인지 싸우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존재론적 성찰을 통해 내 안의 적들과 싸우는 관계가 성립되는 거죠. 이 싸움이 더 치열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보는데요. 아직 말만큼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이미 자본화에 많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못 삽니다. 북한에는 노래방이 없거든요.(웃음) 그만큼 저는 자본에 중독돼 있습니다. 생활 근거지를 옮겨라 하면 자신없습니다. 도시생활을 떠날 자신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서울이 사실 즐거운 지옥 아닙니까. 우리가 지옥이라고 말들은 하지만 서울에서 또 즐거운 것을 얼마나 많이 찾아요. 솔직히 그걸 인정하자는 겁니다. 거기서부터 성찰이 시작돼야 하는데 서울이 지옥이고 농촌이나 자연이 선이다 라는 이분법도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가 이미 자본의 중독자들이고 또 이 즐거운 지옥의 존재자다 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자기성찰이 있을 때 더디지만 그 싸움의 길이 보이는 것이지요.
  제가 이번에 발표한 <도꼬마리>라는 시를 주요 전략으로 삼고 싶은데요. 시의 전략이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도꼬마리의 생태를 보면 제가 어렸을 때는 달라붙어서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도꼬마리는 자기를 다녀간 것들에 집착하고 붙어서 번식을 하죠. 어떻게 보면 유목민적 성격을 담고 있죠. 말하자면 도꼬마리를 다녀가는 새의 깃털, 짐승의 장딴지 그리고 고리똥바지 등속이 그들의 생의 운송 수단인 셈이죠. 그들은 그렇게 생을 이동하고 부려진 곳에서 다시 일가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들의 삶의 방식을 거칠게 추상화시킨다면 집중과 해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문화 예술 현실은 해체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체만이 능사이고 대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해체와 집중을 반복하는 도꼬마리에서 저는 삶의 지혜를 익히기도 합니다.

이재훈: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현대시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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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착란과 자유로운 공황의 미학

 

이수명, 이재훈


 

“모더니즘의 역사는 자살의 역사다”(이승훈)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문학적 담론이나 양식은 이전의 문학적 전통이나 질서를 파괴한 자리에서 세워진다. 아무리 완벽한 미학적 준거들도 시간이 지나면 훈육되고 재생된다. 하나의 작품이 사적(史的)으로 의미화되기 위해서는 그 당대의 시간과 그 시간을 잇는 결절 지점의 가치와 관계되어야 한다. 우리의 문학은 오래도록 전통적 질서의 억압 속에서 갑갑해 왔다. 새로운 문학은 늘 청춘의 치기였으며, 담론의 구호였다. 세대마다 타진되어 왔던 새로움의 길은 이전 아방가르드의 재확인이었고, 실험을 위한 실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수명 시인의 세계는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알리는 하나의 길이었다. 이수명 시인은 한국 시단에 몇 안 되는 스타일리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준 시적 세계와 방법론은 늘 문제적이었으며 가장 극단에 서 있는 전위였다. 그곳엔 환호도 많은 독자도 없었지만 시인은 늘 그 방향에서 스스로의 길을 걸어갔다. 이제는 마니아라 불리는 독자들이 그녀의 시를 다양한 방법으로 감상하고 있다. 후배 시인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녀의 독특한 세계는 시를 읽는 후배들에게 충격적인 정서적 체험을 주었다. 소위 ‘모던한’ 시를 쓰는 젊은 시인들은 대개 이수명이라는 시적 텍스트를 한 번씩 심호흡하며 넘어 왔을 것이다.
이수명 시인의 남다른 시적 세계에 대한 깊은 탐색은 나의 몫이 아니고 명민한 평론가들의 몫이다. 다만, 이수명 시인의 근처를 맴돌았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라는 점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발탁된 것일 게다. 이수명 시인은 말한다. 자신의 시의 토대는 “일종의 공황 상태” 즉 지각, 감각, 기억, 연상 등을 잃고 사라져 버리는 일이라고. 정신이 무장 해제되는 것, 바로 이것이 시인의 시의 토대라고 말한다.(<시학>, <시와사상>, 2002년 여름호) 그 시학의 원천을 함께 따라가 보는 것이 대담을 하며 내가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할 것이다.

이재훈  : <시학>, <시론> 등 당신의 시론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 이 글이 발표되었을 때 여러 시 쓰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평론과 다르게 시인이 쓸 수 있는 이러한 메타적 시론에 조금 목말라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반가웠고, 재미있었고, 좀 외람된 말이지만 당신의 시에 대한 신뢰가 산문으로 인해 더 공고해졌다고나 할까. 요즘 젊은 시인들은 산문 쓰기를 좀 꺼려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시인이 산문 쓰는 것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다. 시인이 쓰는 산문이 매력적인 부분이 많으니까. 오히려 비평가의 막연한 추측을 불식시키고 제2의 비평적 텍스트가 되는 게 또한 산문이 아닌가. 김춘수, 허만하, 이승훈, 오규원 등의 시인들이 예가 될 수 있겠는데 산문이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당신의 시론은 자신의 시에 대한 분석적 시론이기보다 시 전반의 아포리즘에 가까운데 이상하게도 자꾸 당신의 시를 텍스트로 해서 읽게 된다. 당신이 발표한 산문이 시 장르 보편의 시론이 아니라 당신의 시에 대한 독자적 시론으로 읽어도 무방할까? 즉 당신의 시에 대한 개괄적인 해설로 읽어도 되는가?

이수명 : 시론이란 시의 주변을 얼쩡거리는 부랑자 같은 것이다. 주변에 있기에 보고 느낀 것에 대해 몇 마디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말을 그렇게 신뢰하지는 않는다. 신뢰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시론은 기본적으로 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기에 시에 대한 자신의 매혹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혹은 아주 자유로운 것이다. 부랑자는 때로 자신의 매혹에 어떤 형식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이 형식도 자유의 한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자유는 줄어들지 않는다. 매혹 자체를 즐기는 것, 이것이 시론의 특별한 입지가 되는 것이다.
시론이 시의 정체를 밝힌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 시라는 것이 정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론은 시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에워싸는 것인 까닭이다. 시론이 어떠한 체계를 세워 시를 해명하려고 한다면 그 순간 그것은 시를 벗어나게 된다. 시와 멀어진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론이라는 것은 시를 말한다기보다 시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많은 시인들이 시론을 썼지만 그 글들이 훌륭한 안내가 되어 준다 해도 우리는 한 편의 시를 읽을 때 시론에 의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되지도 않을뿐더러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대로 시를 읽을 뿐이다. 그것은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시론에 의지해 시를 쓰지 않는다. 시인이 쓴 시론은 그것이 훌륭한 것일수록, 시론으로부터 시를 해방시킬 것임이 분명하다. 시에 대한 생각과 단상들을 통해 시론은 시가 가진 이 본연의 힘을, 시의 벗어나는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시론이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고유한 일이다.
나는 시론을 몇 편 썼는데, 시론은 무력할수록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론은 비어 있는 그물이다. 비어 있는 그물로 물고기를 상상하는 것.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는 이미 물고기가 아니라 생선이다. 나는 시를 생선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재훈 : “시를 쓰는 일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눈앞에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 사물들, 현실의 이름들을 거부하고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기를 계속해야 한다”(<시학>)는 말은 기존의 전통적인 시론에 대한 반대적 의미로 이해된다. 동일성, 유사성을 시의 질서로 삼는 시론과 달리 동일성과의 결별을 꾀하고 상징, 은유와 같은 시적 수사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것 같다. 이런 ‘차이’의 시학이 당신이 방법적으로 의도하는 부분인가.

이수명 : “무엇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일”이라는 것은 현실의 상징 질서와 의미들로부터의 거리 두기를 말한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과부하가 걸려 있다. 관련의 과부하 말이다. 시간, 공간, 사물들 모두가 체계와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시는 이 관련을 해지하는 것이다. 벤은 ‘관련의 돌파’라는 보다 역동적인 용어를 썼지만. 그는 현실의 붕괴라고도 했다.
관련의 과부하가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든 일들이 돌발적으로 출현하게 된다. 다시 표현해 보자. 모든 운명의 돌발성이 전면화된다. 시는 의미 사슬의 상징체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사물이 갑자기 튀어나와야 한다. 아무 것도 뒤집어쓰지 않고 맨 얼굴로 말이다. 검은 비닐봉지, 벽돌, 사과 따위가 우리를 압도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사물이 튀어나와 있는 시를 쓰고자, 매일 “멀어지기를 계속”한다.
관련의 해지는 한편 사물들의 새로운 관련으로 응수된다. 사물들은 우리를 놀리는 듯이 이상한 관련을 맺는다. 기형적인 짝짓기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최초의 관련이라는 것은 이렇게 괴상한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시는 이 최초의 관련을 기록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재훈 : 당신은 <시는 쓰여질 수 없는 시의 징후이다>(<시와반시>, 2002년 봄호)라는 산문에서 “좋은 시는 세계관이나 창작의 원리, 시를 구성하는 형식을 날카롭게 자각하고 있기에 관심을 끌 만한 시론을 형성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시론의 중요성에 대한 얘기로 받아들여진다. 당신의 <시학>에서는 일종의 공황 상태, 정신이 무장 해제되는 것, 앞에서 흔들어 버리는 교란의 상태가 시의 토대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것은 착란, 카오스의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당신은 그러한 카오스의 세계를 정돈된 질서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당신의 시적 방법과 일정 부분 관계가 있는데, 당신은 혼돈의 세계를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자아가 시에 가담하여 질서의 언어로 만드는 방법으로 읽혀진다. 즉 시의 세계는 착란과 공황이지만, 그 표출 방법은 이성적 자아에 기대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해가 가능한가?

이수명 : 한 편의 시가 교란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나. 시는 지배하려는 장르이다. 그것은 대화와 타협이 아니다. 설득도 아니다. 교란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란은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우리의 정신이 의존하는 녹슨 무기들을 해제하고 우리를 그 지배 아래서 충일하고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까닭이다.
교란의 형식은 어느 한 가지일 수 없다. 나는 언젠가 탁자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물 컵을 보고 “우리를 불안증 환자가 되게 하는데 세계가 동원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 어느 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지기 직전의 물 컵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동요된다. 이때 흔들리는 물 컵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 정돈된 질서이며, 이성적 자아일까? 그렇다면 산산이 깨진 컵과 어지러운 바닥을 보여주는 것은 그 반대일까?
현대시는 혼돈 속에 있다. 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질서라기보다 질서 자체의 표류에 불과하다. 얼음덩어리가 통째로 떠내려가면서 녹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잡아 보는 조각들은 벌써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갈 만큼 흔적도 없다. 우리는 어디로 밀려가는지 알지 못한 채 첨벙인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시쓰기라고 생각한다. 잠수복을 입고 있는 시인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재훈 : 나는 시의 방법론을 취향의 문제로 생각할 때가 많다. 혼돈의 세계를 그대로 방치하여 드러내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주워 들고 새로운 정돈된 형태로 내놓는 경우도 있다. 당신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모두 초현실주의에 속하지만 인위적으로 형태를 늘리거나 비약시킨 달리보다는, 차갑고 구상적인 마그리트를 더 좋아한다는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취향이 당신의 시적 언어와 겹쳐진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의 성정과 취향이 언어와 영향 관계에 있다는 추측인데, 당신이 좋아하는 미적 취향은 어떤지 묻고 싶다. 예를 들면 음악, 그림, 영화 등에 관해서.

이수명 : 지면 관계상 미술만 짧게 예를 들겠다. 나는 존재가 완전히 무너지고 형체가 사라진 추상(뜨거운 추상, 차가운 추상 가릴 것 없이)보다 구상적인 존재의 실마리가 남아 있는 쪽에 더 끌리는 편이다. 예컨대 호안 미로가 입체파를 부정하면서 “내 그들의 기타를 부수리라” 하고 실재로 사물들을 완전히 해체시켜 음악에 가까운 경지로 나아갔지만, 나는 피카소는 말할 것도 없고, 브라크, 그리스, 들로네가 사물의 재구성에서 보인 존재에의 경의를 아끼는 편이다. 입체파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사물들을 보려 한 것이다.
이런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볼까?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극성 속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소위 절대 자유라 불리는 상황을 구가하며 우리를 인간 존재의 위대함에 동참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그 탁월한 예술가들 덕분에, 구체적으로는 미로로 인해 기쁨과 놀라움과 리듬을, 달리로 인해 막다른 동경을, 에른스트로 인해 우리 안의 신경증과 과잉을 알게 되었다. 이 대가들 외에도 이 세계에 속한 많은 예술가들이 우리의 상상력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대개가 자신의 신화를 창조하는 데 몰입해 있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키리코를 보자. 카라, 모란디와 더불어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는 구상과 현실에 바탕하고 있다. 이들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사물과 존재들의 정지와 끝없는 변주는 가히 우주적이다. 소박한 정물화에서 이런 폭풍을 느낄 때 나는 존재란 그 자체로, 가장 ‘많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 존재에 기대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존재를 다 지워 버리기보다는 존재에 의해 내가 변용되는 것을 즐긴다고 하겠다.

이재훈 : 첫 시집의 몇 편을 제외한다면, 완벽하게 시에 일상인으로서의 자아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첫 시집에서도 구체적인 모습보다 개인적인 정서와 열망만을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시를 쓰면서 일상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는 없었는가?

이수명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재미있어 하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는 내 직접적인 삶의 이야기보다 다른 것이 재미있는 경우였다. 그리고 정보가 담긴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일상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숨기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별로 그런 의식이 없이 살아 간다.

이재훈 : 시집 전체를 두고 보면 시에서 정확하게 마침표나 쉼표 등을 찍고 있다. 당신은 산문시에서도 마침표를 정확히 찍고 있는데, 요즘은 안 찍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이것은 시가 몽환 속에서 자동 기술되거나 천성적인 힘에 의해 언어가 밀려가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구두점의 사용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

이수명 : 주로 마침표다. 다른 것은 거의 없다. 마침표는 나에게 침묵을 의미한다. 물론 언어는 모두 침묵을 낳게 마련이지만, 그보다는 직접적인 침묵, 시간과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침묵을 좋아한다. 마침표는 또한 분리를 만들어 낸다. 미쇼는 언젠가 “자연에는 아직도 경건한 분리가 남아 있다”는 말을 했다. 분리란 기표들의 소통이다. 분리가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한데 뒤엉켜 몰려다니는 건 전체성이다. 이 속에서 추구되는 언어의 해방과 유토피아를 나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분리를 하는 건 대단히 중요한 미덕이다.

이재훈 : 나는 개인적으로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를 제일 좋아한다. 언어의 쓰임이 이후의 시집보다 좀 거친 대신 활달한 느낌이다. 시에 등장하는 사물들과 그 사물들의 사건을 통해서 전달받는 정서가 가장 오래 남는다. 두 번째에서 세 번째 네 번째 시집으로 갈수록 달라진 게 있다면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수명 : 내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을 보는 것’이다. 사물들은 여러 곳에 있다. 현실이 괄호 친, 현실의 코드 속으로 합류하지 못한, 비가시적 세계 속의 사물들이 있을 수 있다. 시적 자아는 현실 속에서 그 괄호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다른 대칭도 가능하다. 현실의 한 지점, 기표의 고정점에 있는 사물(말)을 보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자아는 투명하고, 괄호 속의 자아이다.
전자의 경우는 사물들이 현실로부터 일탈되어 있기에 시간과 공간의 논리적 맥락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사물들은 우리의 무의식의 편린들을 가지고 있기에 낯선 소음들을 들려준다. 후자의 경우 사물은 문득 안정된, 한 순간의 현실의 표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안정은 표류와 궤멸의 스타카토 같은 것이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왜가리>와 <붉은 담장>은 전자의 경우가 많이 수록되어 있고, <고양이>에 와서는 <포장품>과 같이 후자의 성향을 보이는 시들이 눈에 띄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재미있는 분류는 되지 못한다.
그들이 놓여 있는 곳이 어디가 되었든 사물들은 탈주 상태에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언가를, 괄호를, 혹은 괄호를 흔들고 있는 자신을 흔들어 버리는 것으로 보인다. 탈주극이라는 점에서 보면 시집들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이재훈 : <붉은 담장의 커브>에서 <트럼펫>, <케익>, <살인자들>, <가든파티>,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 <민들레 총> 등의 시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상상 속에서 사물들이 서로 생장하며 사건을 만드는 것은 의식 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 같다. 대상과 대상이 결합하여 이미지를 얻고 사건을 만들고 있다. 시의 착상은 어떻게 하는지? 일상의 삶 속에서 특별한 사건이나 상황을 수집하는지 아니면, 상상 속에서 그러한 시적 상황이 오도록 기다리는지?

이수명 : 네루다가 그랬던가? 어느 날 시가 왔다고. 누구든지 시가 와도 모를 수 있다. 무엇이 오고, 그것을 알고 맞이하는 일치의 순간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사실은 아무 것도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은 아주 오래 지루한 시간을 지내는 사람들이다. 물론 뒤샹이나 워홀처럼 한순간 변기나 자전거 바퀴, 수프 깡통을 예술로 둔갑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어느 날 에른스트가 한 호텔의 마룻바닥에 종이를 대고 문질러 본 것이 프로타주가 되어 예술의 새로운 한 장을 열게 된 것을 그럴 듯하게 생각한다. 예술이란 이렇게 무위와 허위에서 오는 것이다. 무얼 알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은 뒤샹이나 워홀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그냥 이렇게 저렇게 해 본 것이다.
시나 시적 상황이 온다는 것은 어떤 이데아를 가정하는 것과 같다. 혹은 하나의 관습이다. 예술은 무언가 오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헛된 동작을 하는 것. 예술이 원래 헛것 아닌가? 화가가 선을 하나 그어 보듯이, 그저 말을 하나 던지는 것, 이 말이 어떤 뒤범벅이 되고 낯선 운명을 겪게 되는 것, 이것을 지켜보는 것, 이것이 시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렇게 난폭하고 무절제한 순간을 지니고 있으므로, 시의 정교한 이율배반은 설득력이 있다. 난데없는 우연의 고리들로 치밀하게 짜이는 것이 우리의 세계이다.

이재훈 : 당신의 산문을 보면 외국시에서 감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외국시의 어떤 측면에서 감흥을 받는지? 이것은 내 상상인데, 혹시 원서로 시를 읽는 건 아닌가? 언어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매력을 말해 달라. 또한 이것이 시의 현대성과도 관련이 있을까? 우리시와 외국시의 차이점에서 오는 생각이 시의 현대성과 맞물리지는 않을까 한다.

이수명 : 외국시 국내시 가리지 않고 읽는다. 하지만 다독형은 아니다. 좋은 시인이라고 한 번 생각하면, 시집을 가까이 두고 오래 오래 들여다보는 편이다. 20대 때 좋아했던 시인들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지금도 그들을 내 명상과 상상의 동반자로 여긴다. 동반자가 그렇게 많을 필요는 없다.
시의 현대성이란 사실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현대적이지 않은 주제인 것 같다. 현대시는 이제 자신을 어떤 식으로 진지하게 설명하거나 정의하기에는 너무 많이 차출되었다. 그 잠재성은 모두 노출되었고, 새로운 가능성은 고갈된 듯이 보이기만 한다. 도대체 시에서의 현대성이란 것이 이제 있을 법한 일일까.
이렇게 이야기를 둘러가 보자. 들뢰즈가 ‘기관 없는 신체’라는 말을 썼을 때 지젝의 응수는 ‘신체 없는 기관’이었다. 현대의 삶에는 ‘신체’도 ‘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기체가 되기 이전의 알과 같은 생명 그 자체의 신체가 우리에게 가능하며, 눈, 귀, 혀와 같은 기관들이 기관으로 작동되는지?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들은 모두 우리의 기관이 벌이는 일들이 아니며, 기관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분열되고 낱낱이 해체되어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조차 없게 되어 있다. 사랑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벌써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귀 기울일 내면이 없다. 우리는 항상 어떤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의 또 다른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시는 부재의 기록이다. 다른 것의 다른 것의 또 다른 것을 쫓아다닐 뿐이다.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지만 끝나지도 않는다. 부단히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알아볼 수 없다. 현대시는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그리는 것이다. 이미지, 정서, 인식 모두 알아보기가 힘이 든다. 누구의 것인지, 어떻게 결성된 것인지, 어떤 배합인지 모르게 되어 있다. 어디서 온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주체의 얼굴을 어떻게 그릴까. 현대시는 이 모든 가능과 불가능의 교차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누구도 이 교차로를 피할 수는 없다.

이재훈 :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앞으로의 이수명은 어떤 세계를 보여줄 것인가이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전개되었던 ‘이수명만의’ 시적 스타일을 더 심화시켜 드러낼 생각인가? 아니면 어떠한 방식이든지 변화를 꾀할 생각인지?

이수명 : 사람이란 별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라캉에 의하면 꿈이나 다른 곳에 나타나는 수많은 이미지들의 이면에는 항상 하나의 무의식적인 기본적 환상이 있다. 다채로운 이미지들은 이것의 변용이다. 사람들은 같은 곳에 걸려 넘어지게 마련이다. 변화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나도 내가 걸려 넘어지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반복과 재생산의 리듬이 찾고 있는 전부라는 것이다. 무얼 찾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이재훈 : 요즘 2000년대 전후로 등단한 젊은 시인들의 시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얘기가 많다. 새로운 언어와 문법을 가지고 시를 쓰는 젊은 시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기억에 남는 시인이 있다면?

이수명 : 공석, 사석을 막론하고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은 것 같다. 이 질문도 유행하는 담론이 되었나 보다. 워홀이 한 이야기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다.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다르게 대답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젊고 새로운 시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란 젊고 새로워야 하겠지. 젊고 새로운 시를 쓰려 무던히 애쓰는 친구들에게 애정을 보낸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시가 그렇게 새롭고 앞질러야 하는 것일까를 말이다.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를 말이다. 이 부분에서 하이데거가 “선각자란 미래로 앞질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찾아드는 것”이라 한 말을 생각해 보고 싶다. 미래를 향해 쳐들어가는 것은 미래를 상정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와 사뭇 다른, 제3의 지대가 존재하리라 여기는 것이다. 새로운 어떤 지대를 향해 포문을 여는, 저 앞을 향해 무기를 쳐드는, 이러한 시들이 미래로 침입하는 시들이다.
하지만 앞질러 가야 할 미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미래라는 말을 많이 쓰기는 하지만, 있는 것은 지금 여기의 심연뿐이다. 무기는 밖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조준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조준되지 않는 조준을 시행해야 한다. 심연에 들어야 한다. 시인에게는 쏠 화살이 여러 개 있지 않다. 단 하나의 화살로 지나가야 한다. 세계를 잉태해야 한다. 이것이 미래가 찾아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미래는, 현재다. 발아래 있는 것이다.

이재훈 : 당신의 시가 난해하다고 생각하는가? 독자들, 평론가들이 말하는 난해한 평가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당신 시를 더 잘 읽을 수 있는 노하우를 살짝 귀띔해 달라.

이수명 : 김구용은 “우리가 처한 현실보다 난해한 것은 없다”는 말을 했다. 난해성 운운만큼 상투적인 태도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시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시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난해하다는 판단은 이미지를 해석하려 드는 태도에서 나온다. 이미지란 확고한 것이면서 이상하게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출몰하는 이미지들을 재빨리 그리는가, 상세히 그리는가, 섞어서 그리는가, 혹은 순서 없이 그리는가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을 난해성으로 묶는 것은 투박한 태도이다.
나는 내 시를 읽는 특별한 독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욕망대로 읽을 따름이다. 물론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시인과 작품, 텍스트와 독자, 시인과 독자는 욕망으로 서로 비껴갈 뿐이다. 비껴가는 만남인 셈이다. 시인이라고 해서 자신의 작품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쩌면 누구보다 모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내 시의 변방에 있으며, 그것이 내가 시를 쓸 수 있는 이유이다.

이재훈 : 김구용의 작품으로 박사논문을 집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시사의 난해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렵지는 않은지? 앞으로의 활동 계획도 알고 싶다.

이수명 : 김구용은 우리의 시문학사가 아직 발굴하지 않은 자원이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의 40여 페이지에 이르는 중편 산문시 <소인(消印)>과 <꿈의 이상(理想)>은 현대문학의 패러다임을 고스란히 내장한 채 햇빛 한 번 보지 않은 상태이다. 나는 이 작품들에서 한국 문학의 절정을 보고 있다. 우리는 또 하나의 고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마무리 단계에 있는데 김구용 시인이 많은 사람들에게 연구되고 상상력을 행복하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앞으로의 활동도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시 쓰고, 시 읽고, 틈내서 산문도, 논문도 쓰고, 가르치고, 그런 것이겠지. 비누방울들을 계속 만들고 있겠지.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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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등선을 꿈꾸는 호랑나비돛배를 타고



고진하․ 이재훈



홀로 산길을 오르다 보니,/가파른 목조계단 위에/호랑나비 날개 한 짝 떨어져 있다./나도 羽化登仙의/가벼움을 꿈꾸는 생인지라/연민이 일어 가만 들여다보고 있는데,/개미 한 마리 어디서 나타나/뻘뻘 기어오더니/호랑나비 날개를 턱, 입에 문다/그리고 나서/제 몸의 몇 배나 되는/호랑나비 날개를 번쩍 쳐드는데/어쭈,/날개는 근사한 돛이다./(암, 날개는 돛이고 말고!)/바람 한 점 없는데/바람을 받는 돛배처럼/기우뚱/기우뚱대며/산길을 가볍게 떠가고 있었다./개미를 태운 호랑나비돛배는!

― <호랑나비돛배> 전문


이를테면 상상력은 이런 것이다. 떨어진 날개에 돛을 달아주기. 몸으로부터 거세된 날개는 더 이상 의욕적인 주체자가 될 수 없다. 이때 황망히 나타난 개미는 호랑나비 날개를 제 몸에 싣는다. 여기서 개미는 유토피아의 길을 인도해 주는 파수꾼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 열심히 땀흘린 것뿐이다. 결국 저 호랑나비돛배는 무엇인가. 어디로 향하는 배인가. 우화등선(羽化登仙). 말하자면, 누구에게 밟힐 뻔한 처지에서 돛을 달고 산길을 가볍게 떠가고 있으니 번데기가 나비로 화한 것에 비견할 만하다. 호랑나비돛배는 육보시를 하는 것인가. 우화등선은 도도한 꿈이다. “나는 빛인 적이 없다./해의 기생식물 해바라기처럼 나에게 기대어/그대 안의 어둠을 몰아내려 하지 말라.”(<예수>) 라고 절대자를 인식하는 자아의 의지와 단호함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시인은 황폐함과 죽음의 골고다를 노래했고, 땅을 고르는 아낙네의 손이 뚫린 우주를 누비는 광경도 목도했다. 고진하 시인이 신과 인간의 중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유의 편재성(遍在性)이 두드러지는 것은 진리의 절대성에 적절한 거리를 두기 때문이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말을 빌리자면(<신화의 힘>중 ‘영원의 가면’ 부분), 적어도 그는 형상을 통하여 신을 경험하지 않는다. 형상을 통하여 신을 경험할 경우, 거기에는 우리의 형상을 짓는 우리의 마음이 신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형상이 없는 존재 혹은 형상을 초월한 존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신과 하나되기이다. 신과 하나가 된다면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그라진다. 고진하 시인의 노장에 대한 깊은 관심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시라는 그릇이 진리와 구원에 대한 넓은 긍정을 가능케 하는 가장 적절한 용기라는 것이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는 날, 시인을 만났고 또 빗소리를 들으며 이 글을 쓴다. 이런 비에 대한 친연성은 의욕에서 오는 것이다. 비와 나를 공통분모로 묶어두려는 애정어린 의욕. 인사동 어귀에서 시인을 기다리며 나는 그와의 공통분모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내게서 오래도록 머물 것 같다는 의욕이 자꾸 북받쳐 올랐다.

이재훈:감리교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시절을 듣고 싶습니다. 강원도에서 계속 성장하셨나요?

고진하:영월 주천이라는 산골짜기에서 자랐는데, 워낙 시골이라 문화적인 혜택을 거의 못 받고 자랐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시집 한 권 가져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 대신 대자연의 품에서 마음껏 산과 강과 들판을 뒹굴며 자랐죠.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시를 쓰는 제겐 큰 축복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고등학교까지 영월에서 보내고 대학 입학하면서 서울로 왔죠.

이재훈:<기독교사상>이라는 월간지에서도 일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저는 그 잡지의 애독자였습니다.

고진하: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에 제주도에 내려갔습니다. 제주도에서 첫 목회를 한 거죠. 그러다 올라와서 다시 신학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했는데 대학원 다니면서 <기독교사상>에 입사해서 잡지 편집 일을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학원도 졸업했구요. 신학대학원에서는 문학을 이해하는 교수님이 지도교수가 되셔서 허만 멜빌의 <백경>이라는 소설로 논문을 쓰며 문학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재훈:1987년에 등단을 하셨으면 우리나라 나이로 34세잖아요. 한창 목회에 전념하시고 계셨을 텐데요. 어떤 계기가 있으셨을 것 같아요. 사건이라든지 내면적인 어떤 열망이라든지 하는.

고진하:85년도던가요. 당시에 <기독교사상>에 있었는데요. 군부 독재 시절, 잡지에 게재된 글이 보안법에 걸렸는데, 일종의 필화사건인 셈이었죠. 그래서 안기부에 끌려가서 이런저런 곤욕을 치루고 그 뒤에 압력에 의해 사표를 냈습니다. 그 이듬해 곧바로 영월로 낙향을 했죠. 영월에 낡은 고향집이 있었으니까요. 86년도에 고향에 내려가서 칩거하다시피 하면서 열심히 시를 썼습니다.

이재훈:그 후로는 어떻게 지내셨죠?

고진하:그 이듬해, 97년에 다시 홍천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이라는 첫 시집의 세계가 그 홍천 시절을 담고 있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교회인데 가난하고 척박한 곳이었죠. 홍천에서 5년 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지를 떠나서 출판 일을 1년 정도 했습니다. 어느 기독교 출판사에서 편집주간으로 일을 하다가 다시 그만두고 강릉으로 다시 목회생활을 하러 내려갔죠. 강릉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을 냈고 8년 가까이 강릉에서 목회를 하다가 지난해에 지금 있는 원주로 왔습니다.

이재훈:신학을 공부하면서 문학을 한다는 게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문학도 종교와 비슷한 측면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문학도 구원의 욕망이 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요. 문학과 신학 사이의 갈등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고진하:문학에도 혼(魂)이 있다면 저는 20대 초반에 문학에 나의 혼을 빼앗겼고 제주도에 내려갈 때도 목회에 대한 열망 외에 글쓰고 싶은 욕망이 있어서 내려갔었죠. 그 후로도 계속해서 쓰긴 했었는데 집중은 못했던 거 같아요. 문학의 스승도 없었고요. 혼자 읽고 혼자 쓰는 게 고작이었죠. 대학원 다니고 <기독교사상>에 있으면서도 시에 대한 갈망은 계속 있었죠. 그러다가 영월에 내려가서 1년 동안 참 많이 습작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에 등단을 했는데요.

문학작업과 내가 하고 있는 목회, 신학 사이의 갈등이 현실적으로는 늘 존재했죠. 이를테면 단지 종교를 관념으로 갖는 게 아니라 소위 제도적인 현실 속에서 맞부딪혀야 하는 상황이니까 말이죠. 또한 교인들은 성직자에 대한 자기들 나름대로 기대의 울타리가 있는데, 그것이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 것 사이의 갈등은 끊임없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면서도 문학을 포기하지 못하는, 뭔가 갈고리에 꿰인 것 같은 그런 정황 속에서 계속 글을 쓰고 했었습니다. 그 세월이 10여년 이상 흘렀죠. 지금은 문학하는 행위와 종교적인 행위 사이에 큰 갈등은 없어요. 우리가 무제한의 자유를 갈망하지만 세상에 사는 인간들 치고 얽매임 없이 사는 존재들이 어디 있습니까.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얽매이지요. 나이 들면서 이런 얽매임을 긍정하고 외적인 자유보다는 내면의 자유가 소중하다고 생각했지요. 적어도 <우주배꼽>이라는 시집부터는 비교적 종교와 문학 사이의 갈등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교우들을 만나면서 목회를 하는 과정들이 글쓰는 것에 도움이 되고, 또한 문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목회를 하는 것에도 도움이 됩니다. 상호보완적이죠. 저는 목회만 하는 다른 친구들보다는 시야가 조금은 넓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문학적 독서와 글쓰기, 작가들과의 폭넓은 사귐 덕분이죠. 그래서 교인들을 만나면서도 내가 종교적 도그마에 사로잡혀서 사람을 정죄한다든지 그러지 않게 되었죠. 문학의 자유로움과 상상력은 우리가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사유와 행동의 폭을 넓혀준다고 생각합니다. 삶이라는 게 갈등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불가능한 거고 어떠한 모양의 갈등이든지 있는 거구요. <우주배꼽>부터는 문학과 종교 사이의 갈등이 줄어들고 내 안에서 비교적 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진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죠.

이재훈:지금 강원도 춘천 성암교회에 시무하시는데요. 독자들을 위해 교회에 대해 잠깐 소개해 주세요.

고진하:지금은 담임목회를 그만두고 설교목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주일에만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교회의 행정적인 문제나 교인들을 돌봐야 하는 문제, 이런 것에서는 자유로운 상태죠.

이재훈:선생님의 초기시를 보면 ‘텅 빔’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합니다. 첫 시집의 자서에서도 “푸르른 폐허의 날들. 빈들의 황량함과 텅 비어 있음의 충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텅빈 충만’은 다분히 노장적 사유라고 생각됩니다. 기독교적 사유는 ‘텅 빈’이 없지요. ‘충만’에서 오는 기쁨과 자유라고 해야 더 어울린텐데요. 이 충만은 한없이 낮아지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됩니다. 예수의 생애나 나자로의 생이 그랬듯이 말이죠. 거기에 반해 노장적 사유는 약간 오만한 데가 있습니다. 깨달음의 경지를 빈 것으로 일축해버리는 것을 보면. 하지만 그러한 매력 때문에 어떤 진리나 절대에 도달하려고 하는 시인들은 이런 사상에 매력을 느낍니다. “침묵만으로도 충분히/배부른 항아리들”(<묵언의 날>)의 사유는 어디서 나온 것인지 궁금합니다.

고진하:제 시 속에는 불교적인 이미지도 많이 들어가고 기독교적인 이미지도 들어 있지요. 또한 제 안에는 도교적인 것도 있습니다. 내가 노․장(老莊)을 좋아하니까요. 그러한 것들이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내가 억지로 의도하는 게 아니구요. 저는 예배당 가도 마음이 편하지만 사찰에 가도 마음이 편하거든요. 내 안에 그런 피가 흐르는데 그걸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이번에 발표하는 <연꽃과 십자가>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시입니다. 결국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건데요, 물론 이때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를 말하는 겁니다. 예수가 이 땅에서 기독교를 만든 게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이 나중에 기독교를 만든 것이지요. 종교라고 할 때는 어떤 종교의 제도나 계율보다는 그 종지(宗旨)를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우리는 제도로서의 기독교보다는 예수의 삶과 그 가르침에 천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종교적인 관용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연꽃과 십자가>라는 시에서도 표현되었지만 나보다 크신 분을 의식하게 되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연꽃에 눈을 흘길 이유도 없고 불교인이라고 해서 십자가에 눈을 흘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재훈:아마도 선생님의 직업(?)에 대한 선입관이 작품을 평가하는 데 큰 작용을 한다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고진하:대부분의 많은 비평가들이 내가 성직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내 시를 보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것이 내 페르조나일 수도 있는데요. 그런 면에서는 비평가들에게 다소 불만스러운 점도 있지요.

이재훈:기독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많은 시인들과 작품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문학이라는 용어가 타당한지는 모르겠지만 기독교 문학이라면 우선 진리에 대한 자기확신이 먼저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요. 그만큼 기독교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다른 종교에 비해서 강합니다. 구원은 오직 한 길이라는 게 기독교 정신 아닙니까. 즉 하나님을 마음 속에 구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 10장9절) 이러한 구절은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시는 진리에 대한 확신에 일정한 거리를 둡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많은 기독교 문학과 일정한 변별점이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러면 선생님의 종교관이 문학에 끼치는 영향은 적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는데요.

고진하:소위 불교문학이니 기독교 문학이니 하고 울타리를 치는 것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구요. 그냥 문학이면 되지요. 그걸 기독교문학이니 불교문학이니 그럴 필요가 있는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시를 쓴다고 할 때, 그러면 그 속에 불교적인 것은 없는가, 또 도교적인 건 없는가, 분명 있단 말이죠. 그리고 불교인이면 그 속에 기독교적인 게 없는가, 200년 이상 기독교가 중심인 서양과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면 분명히 그 속에 기독교적인 게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순수한 기독교, 순수한 불교는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백의민족이라고 하지만, 과연 우리가 순수한 혈통인가, 그런 것은 없단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기독교, 이건 불교라는 울타리를 쳐서 문학을 가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내가 기독교 목사지만 내 무의식 속에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불교적인 요소도 들어 있고 도교적인 부분도 들어 있단 말입니다.

소위 한국 기독교가 한때 문제시했던, 예수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는 부분은 상당히 민감한 부분인데요. 실제로 80년대에는 타종교에 구원이 있는가 없는가 라는 문제로 순교당한 분들도 있지요. 아무튼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배타성. 그러니까 다른 종교를 통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라는 이런 배타성은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타종교에 대해서 포용적입니다. 내가 기독교 목사니까 예수를 통해서 구도의 길을 간다 할지라도, 다른 종교를 통해서 구도의 길을 가는 분들의 삶을 폄하하거나 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인이지만 된장, 김치만 고집하지 않고 양식도 먹고 일식도 먹듯이, 불교적인 양식도 때로는 내게 도움이 되고, 다른 종교가 지니고 있는 구도의 방편들이 내 삶을 밝게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제는 옛날처럼 폐쇄적인 세상이 아니라 개방적인 세상이 되었거든요. 서로 배울 건 배우고 서로 협력할 건 협력하면서 대동세상을 만들어 나가야죠.

이재훈:한국의 기독교 시인들 중에 나름대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누가 있을까요. 저는 윤동주를 좋아하는데요. 윤동주의 시는 교술적이거나 진리에 대한 강요보다는 한 영혼의 ‘부끄러움’ 의식에서 출발하여, 그것에 대한 자각, 그리고 결단의 의지까지 보입니다. 최근에는 구상 선생의 신앙시집을 아주 잘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진하:한국에서의 기독교 문학이라고 할 때는 윤동주, 박두진, 김현승 이런 분들을 들 수 있겠는데 이분들의 기독교적인 상상력은 편협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특히 김현승 선생의 시를 좋아하는 데요. 그분은 시를 통해서 인간 존재의 심연을 탐구하신 분으로 경박해진 우리 시대의 문학도들에게 삶을 깊이의 차원에서 들여다보게 해 주는 데 귀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김현승 선생을 기독교문학이라는 좁은 범주에 가두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 관념적인 데가 있어서 습작 초기에는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분의 시가 좋아집니다. 특히 <견고한 고독>, <절대고독> 같은 시편들을 즐겨 읽는 편입니다. 그렇게 좋은 관념시도 드물기 때문이죠.

이재훈:선생님의 시에는 “성스러운 노동”에 대한 신념과 관심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노동’중에서도 1차 생산자로서의 노동입니다. 직접 땀 흘려 얻는 노동의 기쁨을 농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은 아마 선생님의 생활에서 나왔을텐데요. 앞으로도 계속 그런 관심이 지속되겠죠?

고진하:제가 농사꾼의 아들이고 농업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농사를 많이 지어본 것은 아니구요. 바라보는 입장이 대부분 많았습니다. 강릉에 살 때는 땅을 좀 마련해서 직접 농사를 지었는데 거의 흉내만 낸 거지요. <우주배꼽>의 <달개비가 향기롭다>같은 시는 풀뽑기를 하다가 나온 체험시이죠. 이러다 보니까 자연이라는 것. 흙을 만지고 흙을 밟고 사는 것은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앞으로 바램은 전문적인 농사꾼을 못되더라도 터밭이라도 가꾸고 싶습니다. 농부들,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은 신성하지요. 오히려 머릿속의 관념만 갖고 있는 종교인들의 진리에 대한 천착보다 땀흘려 사는 농부들의 삶이 더 신성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한 저는 도시에서도 살아봤고 척박한 시골에서도 살아봐서 양쪽을 다 체험했다고 얘기할 수 있죠, 저는 생태시를 의도적으로는 쓰지 않습니다. 만일 제 시에 생태학적 상상력의 범주에 넣을 만한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제 어릴 적의 체험이나 종교적인 사유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으로 봐야겠죠.

이재훈:종교를 가지고 있는 문학지망생들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세요. 저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곤 하거든요.

고진하:저는 종교보다 인간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인본주의자는 아닙니다. 인간이 종교보다 먼저 생긴 것이고 종교보다 신이 먼저 계시는 것이지요. 그런 것들을 염두해 두면 상상력도 열리고 삶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도 생깁니다.

저는 의도하지 않음을 통해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시를 써야겠다든지 무슨 종교적 깨달음이나 진리를 시에 드러내야겠다고 시를 썼을 때는 거의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보죠. 사실은 모든 예술이 그렇습니다. 호교론적(護敎論的)인 목적을 가지고 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지요. 그런 예술 작품은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런 목적성이 앞서면 창조성이 발휘될 수 없기 때문이겠죠. 우리 시에 종교적인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있다면 그런 목적성이 개입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육화(肉化)된 작품일 것입니다.

이재훈: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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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사랑이 자아내는 서정의 원리



대담 : 정호승, 이재훈

일시 : 2009년 5월 7일
장소 : 스타벅스 남부터미널 2호점

 


 

2009년 5월 7일 오후 6시 40분.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 역사 안에서 정호승 시인을 기다렸다. 6시 30분도 7시도 아닌 6시 40분에 약속을 잡은 것으로 미루어 시인의 꼼꼼한 성격을 짐작해보기도 했다. 한강변에 홀로 앉아 담배를 피우는 ‘서울의 예수’를 생각하다, 노래방에 가면 자주 부르는 ‘우리가 어느 별에서’를 흥얼거리다, 최근 시집 <포옹>을 뒤적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이미 정호승 시인은 남부터미널에 도착해 대담을 할 장소를 물색하는 중이라고 했다. 터미널을 나가 예술의 전당 골목 쪽으로 내려가 만난 커피숍 <스타벅스>. 시인은 창가에 자리를 잡아 놓고, 이 자리가 어떠냐고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인다.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자 시인은 늦은 햇살에 눈이 부시겠다며 탁자를 옮기며 자리를 살펴봐 주셨다. 이 시대 사랑과 감성의 파수꾼 정호승 시인과 이러저런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니 시작 전부터 설레였던 것 같다. 창가로 흘러드는 늦은 햇살이 참 따사로운 날이었다.


이재훈 : 늘 선생님의 독자로만 남아 있다가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처음 선생님과의 대담을 제의받고 좀 망설이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적 유명세 때문인지 문학지의 대담이나 언론 인터뷰만 해도 너무 많은 양이어서 말입니다. 제가 선생님과의 대담 속에서 뭔가 새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또한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직접 뵐 기회도 많지 않다고 생각했고요. 이번 대담은 선생님의 문학과 그 주변의 여러 정황들을 소개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먼저 선생님의 출생지가 경남 하동으로 되어 있는 곳이 있고, 대구로 명기된 곳도 있습니다. 어느 곳이 맞는 곳인가요? 그리고 유년 시절의 얘기도 좀 들려주십시오.

정호승 : 원래 하동에서 출생했어요. 출생지와 고향은 좀 다르니까요. 하동에서 태어나 평택으로 다섯 살 정도에 이사를 갔어요. 부친이 은행원이었습니다. 평택 중앙초등학교 1학년 1학기까지 다녔어요. 그리고 대구로 이사 와서 대구에서 성장하게 된 거죠. 아버지의 고향이 대구였습니다. 그래서 하동은 태어난 곳이고, 대구는 성장한 곳이죠. 하동에서 출생하여 대구에서 성장이라고 약력에 쓰니, 하동에서는 제가 잘 아는 고향 사람으로 알아버리고 대구에서는 고향사람인 줄 알았더니 아니네,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대구 출생으로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하동에서 출생하여 대구에서 성장했다고 정확하게 쓰려고 합니다.

이재훈 : 대구 계성중학교와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셨는데요. 당시 전국을 휩쓰는 고교문사였다고 들었습니다. 대구에서의 학창시절은 어떠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정호승 : 계성중학교는 박목월, 김동리의 모교죠. 대륜고등학교는 이상화, 이육사 등의 문인들이 교직에 있었고요. 육사 선생의 경우, 일제강점기 시대 조선의 학생들은 주먹이라고 강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당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했다고 해요. 참 재밌는 얘기죠. 육사 선생의 시에 나타난 기개가 학생들에게는 권투부로 반영이 된 거죠.(웃음)

이재훈 : 당시 학교 분위기가 문학을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겠네요.

정호승 : 계성중학교가 저에게 문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는데, 매월 문예현상모집을 했어요. 부활절, 추수감사절 같은 행사 때만 한 것이 아니라 매달 했었죠. 당시 학교에서 문학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문예현상모집에 뽑히면 교장선생님의 도장이 찍힌 상품권을 주었어요. 학교 구내매점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을요. 일종의 현찰과 같은 거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 선생님들의 발상이 대단했던 거죠. 당시 삼립팥빵, 크림빵이 30원 할 때거든요. 그러니 천 원하면 무지하게 큰돈이었죠. 빵 사가지고 친구들하고 실컷 먹었지요. 그 재미에 매달 현상모집에 글을 냈었어요.(웃음)

이재훈 : 상품권 타는 재미도 있었겠지만, 그 재미에 쓰면서 저절로 문학공부가 됐겠네요.

정호승 : 그렇죠. 공부가 되죠. 저뿐 아니라 당시 문예반 친구들 중에서도 열심히 쓰려는 친구들이 있었고요. 교장선생님께서 주시는 상금을 받으려는 공통의 목적이 있었겠지만요.(웃음) 또한 선생님들께서 어릴 때 문학의 싹을 틔워야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고요. 아동문학 하시는 김성도 선생님이 계셨고요. 아동문학도 하시고 수필도 쓰시고,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나온 <만선일보>라고 있었는데, 그 신문에 소설 당선되셨던 김진태 선생님도 국어 선생님이셨고요. 그분들께서 늘 문학적으로 성장하게끔 지도해 주셨죠.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이재훈 : 당시에는 고교 문예잡지 <학원>이 있었을 때였죠.

정호승 : 예. 저도 <학원>에서 활동했죠. 중학교 때도 학원문학상에 우수작으로 뽑혔고요. 고등학생 때는 1학년 때 우수작, 3학년 때 최우수작이 되었죠. 학원문단이라는 말도 있었고요. 저도 학원문단 세대죠.

이재훈 : 경희대에 문예특기생으로 입학하셨지요. 경희대에서 주최하는 ‘전국고교생현상문예모집’에서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평론으로 당선되셨는데요. 어떻게 고교생의 신분으로 평론을 쓰실 생각을 하셨는지요?

정호승 : 저는 그때 이미 <현대문학>, <문학춘추> 등의 잡지를 헌책방에서 구해 읽었어요. <현대문학>이 대표적인 잡지였고요. 부모님께서 주시는 용돈을 모아 헌책방에서 과월호를 구입해 다 읽었죠. 잡지에 실린 소설을 읽으면 굉장히 재밌었어요. 어른들의 세계를 알 수 있었으니까요. 평론은 처음엔 잘 모르죠. 그러나 자꾸 읽다 보니까 아, 평론이라는 게 이런 걸 쓰는 거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 거죠. 평론은 작품론을 쓰거나 작가론을 쓰거나 둘 중 하나를 이러한 방식의 글로 쓰는 거구나 하고 이해했죠.
제가 고3때 계기가 있었어요. 경희대 문예장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경희대 백일장에 장원이 되거나 차하, 차상이 되어야 했어요. 저는 그때 참방이 되었어요. 1967년 9월 28일 경희대에서 백일장이 있었는데요. 참방은 문예장학생으로 입학이 안 돼요. 그래서 저는 입시에 떨어진 기분으로 밤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왔죠. 속으로 생각했죠. 내가 서울에서 문예장학생으로 다녀야 되는데. 부모님께서 대학 등록금을 대주실 형편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했었죠. 그런데 11월에 ‘전국고교생 문예현상 모집’이 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시 원고를 보내 도전하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런데 제 생각에 또 시를 보내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조병화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셨는데, 심사평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정군의 시는 상위권으로 입상시키자니 그렇고, 떨어뜨리자니 좀 그렇고 그래서 참방을 준다고 하셨거든요. 그때 알았죠. 내 작품이 문제가 아니고 심사 선생님과 어떤 부분에서 시를 생각하는 영역이 맞지 않는구나 라고요. 그래서 평론을 쓴 거죠. 평론을 할 때 작가론은 무리이고, 작품론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당시 고교생 중에는 시집을 낸 친구도 있었고, 전국백일장에서 당선된 작품들이 있었잖아요. 자연스럽게 그 작품들을 다 모아 놓았었고요. ‘고교문예’라는 말은 제가 만들었고, ‘성찰’이라는 말은 평론에 흔히 등장하는 제목이잖아요. 부제는 ‘고교시를 중심으로’로 했죠. 김우종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셨는데, 평론 당선작은 처음 나왔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때 제가 쓴 평론이 고등학생이 쓴 게 아닐 거라는 의심도 받았어요. 그런데 그 원고를 보면 한자를 자꾸 틀리게 쓰니까, 이게 고등학생이 쓴 게 맞다고 한 거죠.(웃음)

이재훈 : 당시 평론에서 평을 했거나, 지금 활동하시는 문인들 중에 생각나는 고교문사들이 있나요?

정호승 : 그 원고가 아직 제게 있어요.(웃음) 음… 당시에 이시영, 송기원 씨 등이 같은 학년이었고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전국적인 고교문사였죠.

이재훈 : 대학시절은 어떠셨나요?

정호승 : 맨날 시 썼죠 뭐.(웃음) 문예특기생 총장 장학금이 1년간이었어요. 그래서 입학한 지 1년 안에 문단에 등단을 해야 장학생이 유지되었는데요. 그렇지 못하면 등록금을 내야 했죠. 시를 열심히 쓴다고만 다 되는 건 아닌데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미팅도 한번 못해 보고, 도서관에서 시를 썼어요.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야 하니까요. 제가 68학번인데 69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는데 떨어졌죠. 그래서 등록금 마련을 못해 학교를 휴학하고 경주 외할머니댁에 가서 토함산 자락의 오덕암이라는 암자에서 일 년 내내 읽고 쓰고 했어요. 고시공부하듯이.(웃음) 지금 생각하면 좋은 시절이었죠.
그 다음해 70년도에도 신춘문예에 떨어졌어요. 복학을 할 수도 없고 해서 군대를 갔죠. 군에서도 신춘문예를 계속 투고했죠. 일단은 성공했어요. 1972년 <한국일보>에서 동시가 당선되고, 그 다음해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로 당선되었죠. 1972년 12월 24일 우편배달부가 ‘축 당선 연락바람 대한일보 문화부’라고 적힌 전보를 주었어요. 그 전보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행히 복학해서 총장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국 대학에서 문예장학생 제도가 있던 곳이 경희대밖에 없었어요.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제도에 의해서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시를 더 열심히 쓸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죠.

이재훈 :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로 당선되었고,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로 당선되셨습니다.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기도 하셨는데요. 시를 쓰시다가 소설로 등단하신 어떤 이유가 있으신지요. 또 등단 이후 소설 작업은 크게 에너지를 쏟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정호승 : 중학교 2학년 때 학원문학상에 산문이 우수작이 되었던 적이 있어요. <흙의 심정>이라는 산문인데 제일 처음 썼던 것은 산문이었어요. 그런데 그 이후 중학교 내내 시를 썼고, 고등학교 때도 선생님부터 시작해 주위에 전부 시 쓰는 사람들만 있었죠. 그렇지만 그 이후 산문에 대한 꿈이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었나 봅니다. 그 꿈을 한번 펼치고 싶었던 거죠. 1982년도 신춘문예에 처음 써본 소설을 <조선일보>에 보냈죠. 당시 황순원, 전광용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셨는데요. 황순원 선생님은 제자를 뽑지 않으시는 분이세요. 혹시 심사위원으로 황순원 선생님이면 어떡하나 싶어 제 아들 이름을 필명으로 해서 응모했는데 당선되었습니다.
그렇게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갈망으로 시작했는데요. 1982년도가 제가 삼십대 초반이었는데 가정을 꾸리고 직장생활을 할 땐데, 무척 바빴던 시절이었어요. 그때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여성동아> 만들 때였는데요. 일요일도 없이 일만 했어요. 시간이 없으니 도저히 소설은 못쓰겠다 하고, 10년 뒤에나 쓰자고 생각했어요. 그랬더니 어느새 10년이 일 년처럼 지나버리더라구요. 마흔 하나가 되었을 때인데. <월간조선> 만들 때였네요. 그때 직장 그만두고 소설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사십대가 굉장히 문학적으로 소중한 시간으로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었어요. 진짜 다른 걸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게 아니라 소설을 쓰기 위해서 그만두었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소설공부를 하고, 한 오 년 정도의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뭘 깨달았느냐 하면요. 시간과 경제적인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면서 말이죠.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 자기의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가 있구나, 하는 걸 깨달은 거죠. 나는 역시 시(詩)가 내게 맞는구나. 혹독한 댓가를 치르면서 너무 늦게 깨달은 거죠.(웃음) 1990년에 나온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 이후에 97년에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시집을 냈거든요. 그 시집 출간의 간격 사이에 직장도 없이 뭐했느냐 하면요. 소설 공부한다고 보내면서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다시 시를 잡은 거죠. 잘못하다간 시가 날 버리겠더라구요. 어리석었죠. 그 이후로 게으르지 않게 시를 쓰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재훈 : 등단 이후 가장 먼저 활동하신 것은 1976년부터 김명인, 김창완 등과 함께 한 <반시(反詩)> 동인입니다. <반시>는 현재까지 70년대를 대표하는 시동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인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어떠했나요. 그리고 ‘반시’라는 이름의 느낌과 당시 시대상이 유신으로 인해 억압의 시대였습니다. 그런 것과 동인의 모토가 일정 부분, 영향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정호승 : 60년대에 <현대시>, <신춘시> 동인이 있었다면 70년대에는 <반시>가 있었죠. 그때 ‘1973’이라고 해서 그해 시, 소설로 등단한 문인들끼리 모여 친목처럼 시화전도 하고 놀았죠. 소설에는 지금 기억나는 분이 박범신, 이경자, 최학 등이 있었고요. 시 쪽에는 김명인, 김창완, 김승희, 이동순 등이 있었죠. 3년 정도 시화전도 하고 하다가 어느 시점에 시인들끼리만 내보자 해서 <1973>이라고 동인지를 냈어요. <반시>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이후 1973년에 등단하지 않았더라도 뜻에 맞는 시인들이 참여를 했죠. <반시>의 의미는 서문에도 나오는데 일상의 언어로 오늘의 현실을 노래하는 시를 쓰자는 취지였어요. 그 전의 선배 동인들이 너무 난해한 추상의 영역에 머물렀기 때문에 우리는 좀 다르게 가자고 한 거죠.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문학적으로 서로 외로웠으니까 <반시>가 각자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습니다.

이재훈 : 선생님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1979)와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1982)는 선생님의 시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벽편지>(1987)와 <별들은 따뜻하다>(1990)는 첫 번째, 두 번째 시집의 시세계를 좀 더 확장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정갈하고 단아한 언어를 통해 민중들의 삶을 노래하고 있고, 네 번째 시집에서는 ‘무덤’, ‘죽음’, ‘시체’ 등의 시어를 통해 개인의 정서적 상황을 공동체의 삶으로 확장시켜 보여주고 있는데요.

정호승 : 물리적으로 제 문학적 삶을 토막낸다면 1990년에 나온 <별들은 따뜻하다>를 경계로 제 문학이 크게 양분됩니다. 저는 유신시절을 이십대로 보낸 세대인데요. 그 전까지는 시대의 눈물을 닦으면서 시를 쓰려고 노력했었고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오만한 생각인데. 내 자신의 눈물도 못 닦으면서 민중의 눈물을 어떻게 닦는다고.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웃음)

이재훈 : 선생님의 초기작에서 스스로 독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기쁨’을 줄 수 있을지, 기쁨과 슬픔을 나눌 것인지 자문하고 있습니다. 첫 시집의 제목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은 슬픔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슬픔’이 ‘기쁨’에게로. 시집에서도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소재와 상황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습니다. “첫 아이를 사산한 여인”이라든지,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청년”(<슬픔을 위하여>).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갈 길은 멀고 길을 잃”은 ‘맹인부부가수’, “너의 고향은 아가야/아메리카가 아니다”고 말하고 있는 ‘혼혈아’ 등등을 살펴볼 때 더욱 확연히 드러납니다. 제가 중요한 시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슬픔’이라는 관념과 추상성이 어떻게 독자들에게 ‘아름다움’을 줄 수 있는가 입니다. 즉 ‘슬픔’의 아름다움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현실’의 애환이 담보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이라는 관념어가 삶의 지난한 사연과 어울려 빚어내는 어쩔 수 없는 아픔이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었습니다. 초기작에서 두드러진 현실에 대한 관심,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반시> 동인에서의 활동이나 당시 사회적 상황 등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선생님께서 현실에 대한 관심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궁금합니다.

정호승 : 그때 시에 대한 제 생각이 어떠했냐하면요. 장미를 예로 든다면, 저 장미가 인간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장미를 보는 거죠. 장미라는 꽃이 주는 존재의 아름다움이 있을텐데 그런 것보다 장미가 인간의 삶에 무엇을 주고 있는가의 관점으로 시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현실의 삶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는 기본적으로 시대와 동떨어질 수 없겠죠. 그 시대를 산 시인이 장미의 존재성만 노래했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를 살았던 장미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고통을 지니고 있는 장미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죠.

이재훈 : 80년대의 민중시인들과 선생님의 시에 나타나는 민중적 맥락과는 조금 다른 지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데요. 민중을 다루고 있더라도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천착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천착이 강하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정호승 : 그 생각에 긍정을 하고요. 또 어떤 생각이 드는데요. 시라는 장미가 인간이라는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의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 시의 본질은 있거든요. 장미는 꽃이라는 본질이 있는 거니까요. 저는 시의 본질이 뭔지 지금까지 완벽히 아는 건 아니지만 시의 본질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의 본질이라는 게 서정의 물기 같은 게 아닐까요. 나무의 물관부에 수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나무가 말라죽잖아요. 시는 나무의 물과 같은 정서의 본질을 지니고 있고요. 밥할 때 쌀을 비유로 든다면. 쌀을 넣고 물을 부어야 밥이 되잖아요. 시도 마찬가지지요. 생쌀을 먹느냐, 물을 부어서 밥을 해서 먹느냐인데요. 나는 생쌀을 먹기보다는 서정의 물을 부어서 밥을 해서 먹어야 배가 부르다고 생각했어요. 밥하는 것도 물과 불에 의해서 하게 되잖아요. 시도 영원성, 영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질도 변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시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시를 썼기 때문에 제 시가 노동시의 갈래로 묶이지 않고 제 나름의 모습을 지니려고 노력해 온 부분이 있는 거에요.

이재훈 :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시집인 <서울의 예수>를 좋아합니다. 첫 시집보다 훨씬 더 처연한 현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즉 ‘슬픔’에서 ‘고통’으로 나아간다고 해야 할까요. 그 변화의 과정엔 역사적 운명도 있지만 가장 큰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문명’에 대한 자의식을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현재 우리들에게는 역사적 현실보다 훨씬 가깝게 몸에 와닿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서울의 예수>는 지금 읽어도 섬뜩합니다. 이후로는 문명에 대한 자의식이 비판과 풍자를 통한 것이 아니라(<우리들 서울의 빵과 사랑>, <서울복음> 등의 작품) 역으로 사랑의 예찬을 통해 표출하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문명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문명 속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찾는 과정으로 보여집니다. 이렇게 이해를 해도 될런지요?

정호승 : <서울의 예수>는 1982년에 출간한 시집인데요. 문명은 끊임없이 변화되기 마련입니다. 긍정적인 의미이든 부정적인 의미이든 발전하기 마련이에요. 한 가지 예로 제가 어릴 때 전화를 하면서 사람 얼굴을 쳐다보면서 전화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것이 현실화되었잖아요. 제 생각에 미래에는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스카이차 같은 게 나오겠죠. 그러한 새로운 문명에 의해서 새로운 문명의 질서가 생기겠죠. 그렇게 문명화되었다고 해서 우리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것은 아니죠. 인간의 가장 중요한 화두와 본질인 ‘사랑’ 때문에 비인간화 될 수 있는 것이죠. 사랑이 결핍되면 비인간화 됩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결국 인간 삶의 가장 큰 문제와 화두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 때문에 고통스럽잖아요. 사랑의 문제를 남녀상열지사로 폄하시키면 안 됩니다. 사랑은 고귀한 인간의 화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에 의해서 태어나고 사랑에 의해 고통받다가 사랑에 의해 죽어가는 게 인간의 삶 아닙니까. 한 인간이 죽어갈 때 사랑이 없으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사랑이 있을 때 인간답게 품위를 잃지 않고 죽어갈 수 있어요. 인간에게 문명의 변화나 발전이 인간을 망치는 게 아니고 사랑의 부재나 결핍이 인간을 훼손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시인들이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시를 쓸 거예요.

이재훈 : 선생님 시의 방법론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합니다. 선생님의 시는 시적 상징이나 메타포 등을 통한 수사보다는 진술에 의존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생님의 산문 중에 이런 말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배고플 때 밥을 먹지 밥그릇을 먹는 게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밥그릇을 먹고 있다. 시는 밥이지 밥그릇이 아니다. 결국은 인간이라는 밥. 사랑이라는 밥…….” 즉 이미지와 시어가 가진 애매성보다는 직선으로 통하는 진술로 심금을 울리는 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의 상징도 누구나 소통할 수 있는 대중적 상징을 주로 씁니다. 가령, 제가 좋아하는 구절은 이런 부분입니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 길을 홀로 걸으며/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슬픔을 위하여>). 이런 부분은 선생님께서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의욕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호승 : 그런데 시는 본질적으로 은유에요. 은유가 없는 진술은 공허할 수밖에 없고요. 시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은유의 품 안에서 진술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어떤 진술적 시라도 하나의 은유성을 띠고 있는 거죠.

이재훈 : <가두낭송을 위한 시> 연작 등은 첫 시집에서부터 써왔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운율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리듬은 언어의 조탁이나 반복을 통한 것보다는 의미와 의미가 만들어가는 리듬이 강합니다. 실제 낭송을 하며 읽으면 가슴에 팍 와닿거든요. 운율에 대한 관심이 평소에도 있으셨는지요.

정호승 : 지금까지도 그 관심이 있죠. 저는 한국시에서 전통적 서정시인입니다. 한국시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요. 그 전통 속에 운율이 있습니다. 저도 아마 내재적 운율이 내 가슴속에 전통적 운율성으로 부여받게 되어서 나타나게 된 거겠죠. 시의 본질인 노래성을 인정하고 있고요. 저는 요즘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2009년에 시를 공부하면 지금 현재의 시부터 읽지 말고, 소월이나 만해부터 시작해서 오늘의 시까지 읽어오면 한국시의 맥락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시의 맥락을 죽 살펴보면 운율의 문제가 분명 있습니다.

이재훈 : 덧붙여 선생님의 시는 많은 가수들에 의해 노래로 불리워 왔습니다. 최근 가수 안치환 씨가 <안치환, 정호승을 노래하다>라는 9.5집 음반을 내기도해서 화제가 되었는데요. 선생님의 시를 노래화한 것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어느 별에서>가 애창곡 중의 하나입니다.(웃음)

정호승 : 제 시를 가지고 대중가요로 40여곡 정도 작곡되었는데요. 가장 먼저 노래화된 게 이동원의 <이별노래>에요. 이동원의 <이별노래> 이후에 정지용의 <향수>를 만든 거예요. <향수>의 모태적 발판을 마련해준 게 <이별노래>일 거예요. 그 다음에 김광석이 마지막으로 녹음하고 남긴 노래여서 의미가 있는 <부치지 않은 편지>가 있어요. 백창우 씨가 작곡을 했고요. 그 다음에 안치환 씨와의 우정을 들 수 있어요. 우정의 앨범을 냈으니까. 제 시를 가지고 많이 작곡 했어요. 이번 앨범에 작곡된 노래 중에 <풍경 달다>라는 노래가 있어요. 제가 풍경을 달아본 체험을 가지고 쓴 시에요. 운주사의 와불을 보고 풍경을 달았던 기억으로 쓴 시인데요. 노래를 들으니 아, 참 좋더라구요. 제가 노래를 빨리 외우거나 부르지 못하는데, 금방 외워 불렀어요. 지금도 가끔 아무도 듣지 않을 때 혼자 불러 봅니다.(웃음)

이재훈 : 선생님의 후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제5시집부터 7시집까지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시집의 세계가 사회공동체와 고통과 슬픔에 대한 관심에서 관념의 보편적 정서에 관심을 기울이는 곳으로 이동했다고 해야 할까요. 이전의 세계가 산업화 사회 속에서 잃고 지냈던 우리의 공동체, 주변의 약자들과 소외된 자들, 천천히 뒤돌아봐야 할 작은 생명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으로 시적 시선이 가 닿았습니다. <별들은 따뜻하다> 이후 7년만에 출간한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보면 우리 민족의 공동체적 정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느낄 수 있는 보편적 정서가 드러납니다. 하응백 씨는 “과거의 시가 관념적 체험의 픽션의 소산이었다면, 추상적 민중을 향한 노래였다면, 이번 시는 자신을 대상으로 한 시로 변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변화하게 된 특별한 내적, 외적인 계기가 있었을까요?

정호승 : 그때부터 제가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거죠. 그 전에는 우리 속에 있는 나를 생각했는데요. 뭐라고 얘기하면 좋을까요. 섬을 비유해서 얘기하자면 바다에 떠있는 섬은 개인인데 바다 밑의 섬의 뿌리는 다른 섬과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 전에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섬만 보지 않고 그 밑에 연결된 다른 것을 보려고 했죠. 개인을 통해 전체를 보려고 한 거죠. 그런데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부터는 섬이라는 개인의 개체를 집중적으로 보려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형상하는 삶이라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가장 가치있는 부분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거죠.

이재훈 : 이전 시집에서는 기독교적 메타포나 소재가 언뜻 보였는데,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서는 오히려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인상비평에 불과한데요. 타인과의 부대낌 속에서 얻어지는 시적 감성보다 자신에게 향하는 사색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홀로 오래도록 소요하고 명상하여 나온 시어들이 눈에 띄게 보입니다. 시집의 첫 번째 실린 <새>라는 작품에서 “새가 죽었다/참나무 장작으로/다비를 하고 나자/새의 몸에서도 사리가 나왔다/겨울 가야산에/누덕누덕 눈은 내리는데/사리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새떼처럼 몰려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 시에서도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미안하다>)라고 합니다. <수덕사역>에서는 버림의 자세가 보입니다. “꽃을 버리고 기차를 타다/꽃을 버리고 수덕사역에 내리다//중략/해는 저물고/수덕사로 가는 눈길/발은 없고 발자국만 남아 있다//악!”. <국밥>에서는 윤회의 사상을 엿볼 수 있고요. “사람 사는 세상에 살면서/소머리 국밥을 먹는다/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소들이 사람머리 국밥을 먹는다”. <허허바다>에서도 버림의 미학이 있습니다. “찾아가보니 찾아온 곳 없네/돌아와보니 돌아온 곳 없네/다시 떠나가보니 떠나온 곳 없네”
오랜 공력을 쌓아 이를 수 있는 어떤 지점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혹시 그간 다른 내적인 수련을 한 것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정호승 : 선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나이가 좀 드니까 그런 부분도 있구요.(웃음) 저는 기독교문화 속에서 저의 영혼을 성장시켜왔고 지금도 기독교적인 문화가 저의 양식이고 한데요. 그렇다고 해서 불교적 문화를 도외시하는 건 아니거든요. 아까 운주사 얘기도 나왔는데요. 정말 운주사 와불을 뵙고 내려오는데 삼존불이 있어요. 삼존불 중의 한분이 앉아 있는데 얼마나 감동적인지 그 부처상을 보고 진짜 울었어요. 얼굴이 마모될 만큼 마모되고 모든 걸 비우고 있잖아요. 그때부터 부처님의 불가의 세계, 불교적 세계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 후로 불교적 이미지를 시에 차용해 온 거죠. 삶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욱 크게 가지려고 노력한 결과로 보아주시면 됩니다.

이재훈 : 선생님께서 작품 속에서 말하는 사랑이 인간에 대한 예의뿐 아니라 모든 만물에게까지 통용된다고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인데요. “강가에 초승달 뜬다/연어떼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나그네 한 사람이 술에 취해/강가에 엎드려 있다/연어 한 마리가 나그네의 가슴에/뜨겁게 산란을 하고/고요히 숨을 거둔다”. 동물이나 사물을 통해서 인간을 성찰하는 부분도 불교적 상상력과 연을 닿는다고 생각하는데요.

정호승 : 사물도 나와 동등한 생명체이자 인격체이죠. 절대자가 보기에는 동물이나 인간이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지 않겠어요. 그런데 인간이 오만하기 때문에 개나 돼지 같은 동물의 가치를 하찮게 보는 거죠. 시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 그렇게 나온 거겠죠.
인간은 자연적 존재죠. 자연의 기본적인 질서와 똑같은 질서를 지니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에요. 제 책상에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는데요. 토성을 중심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그리고 토성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 있어요. 볼펜똥보다 더 작은 점 하나가 있는데 그게 지구에요.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크며 지구가 얼마나 작은가 알 수 있죠. 그 속에 우리가 사는 거예요.

이재훈 :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제7시집에서부터 잡지 지면에 발표하지 않은 신작시를 시집으로 묶고 계십니다. 그 이후 시집들도 잡지의 미발표 신작들을 상당수 시집을 통해 싣고 발표하고 계시는데요. 문단의 매체나 제도, 혹은 평가에 연연하지 않겠다, 독자들과 직접 만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비춰집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호승 :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시를 쓰는 저의 방법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저는 시를 한꺼번에 몰아서 써요. 일년 이년 삼년 정도 메모를 해요. 메모가 두꺼운 노트 한권을 채울 때까지 메모만 하다가 그 노트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써요. 그러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몇 개월에서 길게는 일 년씩 쓸 수 있어요. 그래서 그 노트의 메모를 가지고 시를 다 쓸 때까지 가는 거예요. 두 번째는 이런 이유 때문에 시가 가장 많이 생산되어 있을 때는 청탁이 없는 거예요. 시를 못 쓰고 메모만 하고 있을 때는 청탁이 들어오고요.(웃음) 저는 문단에서 특별히 큰 교유가 없고 외톨이에요. 어느 부분에서는 혼자인데 시인은 또 혼자 있는 존재잖아요. 저의 이러한 문단의 비사회성 때문에 제 상황을 잘 모르고 청탁이 이루어지니 잘 맞지 않는 거죠. 시를 한꺼번에 쓰니까요. 그래서 한꺼번에 쓰고 청탁을 기다리다가 청탁이 없으니 그냥 시집을 내는 거죠.(웃음)

이재훈 : 8시집에 가서는 이 시대의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의 아픔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이 선생님 방식의 내적 치유의 과정이 아닌가 생각해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9시집의 <포옹>에서는 ‘우리 시대 사랑의 명상가’라는 말처럼 반성과 응시, 침묵 끝에 들려주는 사랑의 언어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세계를 보여주실 계획으로 시집을 준비하고 계신지요.

정호승 : 앞으로 시를 더 열심히 쓸 생각입니다.(웃음) 제 존재의 여러 가치 중에 시인으로서의 가치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더라구요. 그러면 우선 시인은 시를 쓰고 있어야 시인이니까 열심히 쓰고 있고요. 앞으로도 쓰게 되겠죠.

이재훈 : 선생님의 말씀 중에 “시를 쓰는 사람보다 시를 읽는 사람들이 더 고통받는 시대다”는 말씀이 더 가슴에 와닿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정호승 : 감사합니다. 오랜 시간 저도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_ <열린시학>, 2009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



메탈지프를 타고 노란 잠수함으로 가라 앉기



김태형 이재훈

 

오직 견뎌 내는 일 견뎌 내면서 서서히

밑으로 더 아득한 심해 속으로 숨차 오르는 일

그래 무겁다는 것은 얼마나 숨 가쁜 일인가

가슴 죄는 일인가 허파를 가지고 있다는 이 사실은

그 얼마나 솟구치는 벅찬 설렘인가 이 고요는

― <노란 잠수함> 중에서

 

청춘에 회복이란 없다. 일시적인 위안은 있어도 다시 그 안락한 안위로의 되돌아감은 없다. 애초에 그런 자리조차 없었다는 듯이 끊임없이 흔들리며 숨가쁘다. 몇 번의 탈주를 경험한 자의식은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 정식으로 현실적인 삶 속으로 편입된 것이라고 스스로를 애써 타이른다.

김태형이 마련한 노란 잠수함은 “아아 이제 이 흔들림은 너무나도 편안하다”라고 말한다. 너무도 어른스러운 말이어서 그가 ‘메탈지프’를 타고 “빗속으로 시속 백구십 이백 어때 숨쉬기조차 힘들지/헉헉 마구 벅차 오르지 그래 달리는 거야”(<메탈지프>)라고 외치며 출렁거리는 젖가슴과 번들거리는 허벅지를 상상했던 그 속도의 탈주와 얼른 겹쳐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대시인이 떠나고 없는 낯선 고장에 여행객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그 진리와 모순의 교집합(모래 바람이 불었다. 나의 몸은 낮게 석양이 저무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낯선 고장에서의 하루는 흔적도 없이 저물었다. 대시인은 그날 오래도록 집을 떠나 없었고 그에게 대답을 얻고자 기다리며 줄지어 선 여행객들은 계속해서 늘어났지만 누구도 함부로 이곳에 도착한 자는 없었다. - 시집 <로큰놀 헤븐> 자서에서)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그 때문인지 그의 노란 잠수함은 “무겁다는 것은 얼마나 숨 가쁜 일인가”라는 결핍의 고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허파를 가지고 있다는 보편적 사실을 내내 상기한다. 단순할 것 같은 이 인식은 ‘고요’를 ‘솟구치는 벅찬 설렘’으로 탈색하게 하는 정신적 힘이 되는 것이다.

김태형 시인은 이런 정처없음의 배회 속에서도 지독히 자아의 정체성을 심문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려는 사유의 노력가이다. 어쩌면 시인은 너무 일찍 ‘노란 잠수함’을 알아 버렸는지도 모른다. 피부가 찢어지도록 빠른 속도 속에서 그는 몇 번의 하드코어 외침으로 청춘의 격렬함을 대신했다. 그리고 사유 속에서 자맥질하며 아득한 심해 속으로 숨차오르는 일을 내내 경험하고 있다.

서울 태생의 한때 록음악에 심취했었고 시쓰기와 책읽기로 20대를 보낸, 지금도 여전히 문학에 뜨거운 피가 끓어넘치는 시인. 이제는 아빠가 되고 등단 10년째가 된 젊은 시인의 사유의 흔적이 아래에 빼곡히 적혀 있다.


이재훈:예전부터 시집을 읽고 느낀 것인데요. 김태형 시인에게 어떤 선입관 같은 것들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김태형 시인을 전형적인 모더니스트라고 보는 경우라고 해야 할까요. 시집 <로큰롤 헤븐>에서 록음악과 관련된 시들이 10여 편 정도이고 나머지 시들은 전통적인 시적 방법론을 잘 지킨 서정시 계열의 시들이었는데요. 문제는 선생님의 시를 논할 때 록음악과 관련된 시들만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똑같은 시집이 최근에 나왔다면 오히려 다른 시들이 주목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시집의 제목도 상당한 영향이 된 것 같습니다. 제목이 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얘기하는 것 같거든요.


김태형:처음 시집 원고를 넘겼을 때 시집 제목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시집 출판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다른 원고보다는 뒤로 밀리게 됩니다.

원고를 보내고도 꽤 시간이 지나갔어요. 일단 시인이 한 권의 시집을 정리하고 나면 기존에 자신이 가졌던 언어들을 심화하거나 확장하면서 혹은 버리면서 거듭나려는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그 무렵에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록음악과 관련된 시들을 쓰고 발표했는데 시집의 첫 교정지를 받고 나서 그 시들을 추가하게 되었어요. 시집 제목도 바꾸게 되었고요. 처음 원고를 넘겼을 때는 그런 시를 쓰지도 않았거든요. 그래서 시집 해설에서조차 거론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해설이 나온 상태였거든요.

시집이 나오고 난 후에는 대부분의 평자들이 시집 제목에 초점을 맞추어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외의 시들은 제 시세계의 기저를 이루는 층위로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이후 몇 년까지도 문예지에 신세대 시인들의 특집이 나올 때마다 제가 실험시인으로 분류가 되어서 록음악과 관련된 시들만이 거론이 되었습니다. 1995년에 시집이 나왔으니까 이후 몇 년 동안 제 시에 대한 논의는 조금 편향된 지점에서 이루어졌던 것 같아요. 한동안 ‘실험’, ‘키치’, ‘신세대’, ‘대중문화’ 등의 코드들이 저를 에워싸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련의 시들은 제 시가 가지고 있는 세계의 극히 일부였습니다. 그 외의 시들에 대한 평가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에서 시인으로서는 불행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만큼 그 시들이 갖고 있는 개성이 너무 강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래서 제가 일련의 계열을 잇는 시인으로서 거론되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정확히 말하면 저는 실험의 양식을 취한 것이 아니라 우리 세대의 문학적 고민을 조금 일찍 드러냈던 것뿐입니다.


이재훈:실험시를 쓰는 시인으로 주목을 받았다는 점이 실험시를 계속 쓰게 만드는 이유가 될 법도 한데요. 말하자면 평단이 원하는 것과 시인 자신이 원하는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할까요?


김태형:실험시에 관한 제 생각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우선 읽혀야 그 실험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인데요. 제 시는 형태를 중시하는 방법론적인 태도가 아니라 내용의 문제였다고 생각해요. 전위라는 것은 시대를 미리 앞서가는 것이라기보다 그 당대성을 첨예한 시각으로 뒤집어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만큼 저에게는 현실을 좀 더 직접적으로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언어가 요청되었던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저를 지나치게 모던한 쪽에 초점을 맞추는 건 90년대의 폭발적인 대중문화와 시 장르를 접목하려는 암묵적인 시각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나름대로는 다양한 시도들을 했어요. 이전에는 록음악에 경도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후에는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던한 시를 발표한 것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요. 등단작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짙은 서정 계열의 시를 발표했는데 아무래도 모던한 시들이 던져준 인상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저의 다른 일련의 작업들은 상대적으로 낡아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저로서는 좀 아쉬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재훈:첫 시집 이후가 궁금해집니다. 평자들이 주목하는 시와 시인이 주도적으로 쓰는 시의 차이가 그 과도기를 더 격렬하게 했을 것 같은데요. 평자들이나 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첫 시집에서 가졌던 문화적 코드를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또 어떤 문화적 코드를 가지고 나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원하는 부분이 있었다구요. 그런 문단에서 요구하는 새로움과 그 과정 사이에서 오는 시적 행로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김태형:벌써 첫 시집을 내고 7년이 지났고 올해가 데뷔 만 10년째입니다. 시집 이후에 상당히 갈등이 많았습니다. 첫 시집에서 저는 한 권에 담을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섰다고 봅니다. 그 시집에는 상당히 고전적인 설화시들도 있고 연애시, 동물 알레고리를 결합한 시도 있었습니다. 일련의 사막을 배경으로 드리운 시들과 육체와 상처의 이미지, 록을 소재로 다룬 시들, 그리고 숲 연작시 등 다양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시집이었어요. 시집 한 권에 담을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버렸던 거지요. 그때는 제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지 내 스스로 언어의 한계치를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문학평론가 신철하 선생은 “자기의 생존 조건이 극히 위기의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마지막으로 꽃을 피워올리기 위해 있는 힘을 다 쏟아붓는 한 화초의 환각”(<여보세유!>, <현대시사상>, 1996년 봄호.)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이 당시의 저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집 이후에 한 단계 거듭나는 시세계를 보여줘야 하는데 나 스스로가 그 부분들에 대해서 만족을 하지 못했고 몇 년간 절필하다시피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어떤 것일까를 끊임없이 되묻곤 했습니다. 다른 이들이 저에게 바라는 기대 지평에 스스로 함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첨단과 복고의 끊임없는 길항 관계를 체화한 격렬한 시세계를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많은 시간들이 필요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남들이 새로운 것을 내놓으라고 할 때 오히려 고전적인 것들을 풀어놓는 이상한 습관을 보이곤 합니다. 그것이 저의 싸움의 방식입니다. 젊은 시인들에게 새로움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새로움에 대한 요청이 시를 망치고 있다고 봐요. 결국 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 시인의 그럴 듯한 이미지만 남아서 스스로를 파먹으며 연명하게 만들지요. 그런 경우를 볼 때마다 저는 안쓰러움을 느낍니다. 문화적 코드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것을 ‘문화’라는 틀에서 접근하면 시가 너무 생경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그런 표현을 잘 쓰지는 않습니다. 저에게는 ‘서정적 코드’라고 해야 어울리겠네요. 보통 ‘지적 모험’이라고들 말하는데 저는 거기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정적 모험’을 중시합니다. ‘서정’이란 결코 고전적이거나 낡은 것이 아니거든요. ‘서정적 코드’를 말하는 위치에 서서 그 ‘문화적 코드’를 바라보게 되면 소위 ‘지적 모험’이 보일 것입니다.


이재훈:일찍이 손진은 선생은 <해체의 새로운 모습과 그 언술적 독법>(<현대시>, 1996년 9월호)이라는 글에서 선생님의 시가 가지고 있는 서정성에 대해 논한 바 있습니다. 내용은 자연에 대한 친연성, 대상과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서정과 밀접하지만 형식 면에서 해체적 코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러한 형식면을 긴 화법을 통해 이미지를 구사하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발표하는 시들에서도 긴 화법을 통한 이미지 구성을 엿볼 수 있고 서정성 또한 더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첫시집과 최근 시들의 방법론 상의 차이 같은 게 있겠지요? 아마 정신적인 면에서 바뀐 부분이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김태형:손진은 선생이 <히말라야시다에게 쓰다>를 분석한 글을 읽고서 제가 시를 너무 못 쓰지는 않았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제가 의도한 것들을 세밀하게 잘 읽어주셨으니까요. 자연과의 친연 관계는, 아마도 저와는 좀 거리가 있을 거예요. 대상과 이미지를 해체해나가는 방법에 관심이 있는데 제가 ‘서정적 모험’이라고 돌려서 말하는 데에는, 실험과 전위라는 말이 담보하고 있는 방법적 태도, 새로움에 대한 빗나간 기존 시각으로부터 제 시쓰기를 가두어두지 않으려는 고통 때문입니다. 이전 시들이 갖고 있었던 호흡은 상당히 긴 편입니다. 보통 짧은 호흡의 시들에서 리듬감이 잘 발휘되곤 합니다. 그러나 제 시는 긴 호흡을 통해서 나오는 거친 리듬을 만들거든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 끊어지지 않는 호흡을 통해 잘 정돈된 리듬이 아니라 보다 격렬한 리듬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래에 발표하는 시들은 그런 긴 호흡을 자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선 시가 상당히 짧아진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연애시를 못 쓰듯이, 제가 다루는 이미지나 호흡마저도 예전과는 어느 정도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이전에는 거친 호흡을 따라갔다면, 이제는 이미지들이 안으로 집중되면서 소용돌이치는 상징의 힘에 제 몸을 맡기는 쪽입니다.


이재훈:선생님의 문학적 질료가 되는 것들 중에 많은 부분들이 문화적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정시 자체도 한 개인의 특수한 경험을 담보로한 시이기보다는 문화적인 체험을 통한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물에 대한 철학적 체험이라고 할까요. 이른 나이에 등단을 하셨는데 젊은 시절의 문화적 체험들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김태형:글쎄요. 다른 나이의 세대와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록에 대한 체험일지도 모르겠네요. 취향이야 세대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세대가 유사한 음악적 교집합을 찾기는 힘들 듯이 분명 다른 부분이 있을 거예요. 음악의 경우에 이 취향의 문제는 어느 정도 특이한 부분인 것 같아요. 90년대에 들어서서 홍대와 신촌을 중심으로 록카페가 부흥기를 맞고 있었어요. 그 전에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종로의 작은 공연장 정도였습니다. 신촌과 홍대를 중심으로 좁은 공간에서 춤을 출 수 있는 록카페는 록음악과 맥주와 섹슈얼리티가 공존하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세대는 보다 폭발적인 음악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록음악에 빠져들었지요. 일렉트릭 기타의 한번 긁어내리는 폭음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것은 그 소리를 몸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의 체질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 같아요.

덧붙인다면 요즘 어떻게 하면 대중문화를 문학에 접목시킬까 하고 고민하는 게 저는 참 우습게 보여요. 그만큼 문학이 현실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대중문화를 문학에 접목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껴야 하는지 저는 이해가 잘 안되었습니다. 물론 문학은 허구를 통해서 진실에 이르는 장르입니다. 하지만 사실과 현실의 세계를 허구의 폭력으로 가두어두면서부터 문학은 실체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문학에서 말하는 현실의 개념은 실제 우리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현실과 일상이 문학에서는 다른 개념으로 소통되는 느낌이었어요. 대중문화를 소재로 차용하거나 혹은 그 속성 자체를 다루는 작품의 경우라 하더라도 그 본래의 문학과의 싸움이 전제되지 않으면 단순한 소재주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저의 몇몇 시들은 이런 소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기존 문학이 끊임없이 유포해왔던 ‘반성’의 미학에 대한 거부로서 저의 몇몇 시들은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의도이기도 하고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대중문화를 차용한 작품들이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 정신을 담보로 그 의미를 확장하려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또 다른 ‘거짓’을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뻔히 보이는 ‘반성’과 ‘비판’의 태도야말로 다시 한번 뒤집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의 세대가 맞이했던 문화적 체험이 있다면 저 허위적인 반성과 비판의 지식으로부터 스스로를 풀어내려는 자세일 것입니다.


이재훈:웹사이트 기획, 제작이 직업이 되었으니까 컴퓨터도 시작(詩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요?


김태형:시를 쓰는 데는 오히려 역효과가 났지요. 먼저 이야기를 하자면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인 매우 소중한 체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컴퓨터를 시작하고부터는 글을 못 쓰게 되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시세계의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시쓰기를 일시적으로 멈추는 방법을 선택했던 이유도 있었지요. 하지만 컴퓨터와 통신, 인터넷 자체가 저에게는 글을 쓸 수 없게 만드는 새로운 환경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문제는 제가 몸담은 그 세계가 저 자신에게 글을 쓰게 만드는 내적 충동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지요. 오직 그 공간에만 신경질적으로 매달리면서 한동안 시를 못 썼어요. 시를 쓰지 않으면서 그간 제가 이루었던 어떤 세계의 일단을 되래 놓치고 있었던 거예요. 어느 정도의 수준을 회복하는 데만도 꽤 많은 날들을 보내야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시간이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요즘은 네트워크를 사유화하는 시를 조심스럽게 쓰고 있는데요. 이런 시간들이 내적으로 잠재되어 있었으니까 지금 이렇게 빠져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나 상당히 오랫동안 저로 하여금 글쓰기에 벽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의식과의 싸움은 이제 고작 시작일 뿐입니다.


이재훈:간간히 평론도 발표하시고 계시는데요. 디지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평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글쓰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디지털하고 친해지기가 힘듭니다. 본능적으로 어떤 선입관인데, 기계적인 것과는 반감 같은 게 있습니다. 한동안 PC통신을 시작하면서부터 전자매체와 문학과의 관계를 논한 글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던 때가 있었는데 그런 글들의 대부분은 뜬구름잡기 식이거나 이왕에 있었던 것들의 반복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인터넷을 안하고는 안될 만큼 우리 삶의 또 다른 한 부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공간이 아직까지 시의 장벽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더 옛날로 돌아가는 듯한 인상까지 받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우리 삶의 한 부분임을 이제 부정할 수 없다면 이런 부분들이 어떻게 시 속으로 들어와 시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지의 문제에 대해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일각에서 하이퍼텍스트 시나 몇몇 시도들을 하고는 있는데요.


김태형:지금 컴퓨터나 인터넷을 다루는 몇몇 시들이 있는데 그런 시들의 대부분이 실험성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결과겠지요. 왜 시와 네트워크 사회가 아직까지 불화를 하고 있는가 생각해봤더니 시가 가지고 있는 서정성이 너무 강해서 그런 것 같아요. 우선 서정에 대한 개념이 바뀌지 않고는 네트워크 사회를 시에서 수용하기는 힘듭니다. 시가 가지고 있는 서정성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전통적이고 복고적인 경향이 두드러지는데요. 그런 서정이 담보했던 수위를 네트워크가 가지고 있는 차갑고 즉물적인 금속성의 서정으로 대체할만한 언어가 우리에게는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시가 실험성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제는 컴퓨터를 몰라서 못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예전 도스 시절에는 그래도 명령어 몇 개쯤은 알아야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었어요. 게다가 사용자가 직접 네트워크와 접속하기 위해서 모뎀을 사다가 세팅을 해야 하는 등 하드웨어적인 지식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통신회사에 전화만 한 통화하면 바로 인터넷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컴퓨터를 몰라도 되는 사회에 와 있습니다.

이 네트워크 사회가 시로 승화되려면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절에 시가 소설보다 더 시대를 발빠르게 언어로 담아낼 수 있다는 관점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의 네트워크 사회를 시의 언어로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자기 내부에 잠재되고 체화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미 PC통신이 본격화되면서부터 문예지에 여러 특집들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사실 통신문학은 장르문학에 다름 아니지요. 문단에서의 이러한 관심들은 그다지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유행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온 듯하네요. 그러고도 이제 막 시작 단계에 머물러 있잖아요. 새로움에 대한 광적인 집단 무의식이 현실에 대한 발빠른 적응력을 키워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반면 거짓 문학이 저잣거리의 언어를 들고서 새로움의 포즈를 취하는 것은 결코 막을 수 없을 거예요. 우리는 늘 허상을 붙들고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이재훈:저는 속도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시를 읽을 때 필요로 하는 시간이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죠. 시를 읽을 때는 침묵이 필요로 합니다. 행간과 행간 사이, 그리고 말과 말 사이의 침묵과 시간이 필요한 데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이러한 시간이 아주 불편한 요소가 되고 있는 거죠. 이제 인터넷에서도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닌가요.


김태형:겉으로 보기에는 실시간을 중시하는 인터넷의 특성상 그렇게 보이기도 하는데요.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의 공간은 결코 지도로 정형화해서 그릴 수 없는 미로의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 미로의 개념을 속도라는 경제적 사유로 풀어낸다면 그야말로 광대한 전자 시장에 머물 것입니다. 문학은 그 인터넷의 속성을 상징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로와 미로 사이의 굴절, 그 우주적 상징의 기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저 들끓는 말들의 세계를 하나하나 끈질지게 물고늘어지면서 풀어나가면 어떨까 싶어요. 이제 인터넷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서 말과 말의 관계로 이동한다고 봅니다. 이제는 또 다른 언어의 사회로 다시 되돌아온 것 같습니다. 다르다면 말의 무용성이 드러내는 그 상징성이 더 중요할 것 같아요. 미로와 언어와 숨은 자아들의 소통관계, 이러한 관계 속에서 생기는 시간성을 상징화하는 작업이 필요할 듯합니다. 서구의 고대 신화가 말과 말의 풍요로운 상상의 세계를 통해 다이달로스의 미궁을 탄생시켰다면 이제 현대의 테크놀러지 사회가 네트워크라는 스스로 진화하는 미궁의 길을 넓히고 있습니다. 그곳은 거대한 말의 소음들이 우주 먼지처럼 푸른 허공 중에 가득합니다. 그토록 시인들이 찾아 헤매던 우주의 자궁이 아니겠습니까.


이재훈:네트워크의 수많은 말들 중에서 의미성을 담보하고 뱉어내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러한 말들을 어떻게 구별해 내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니면 수많은 말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김태형:저는 인터넷의 쓰레기 언어조차도 오히려 시인들에게는 유용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급화되고 단련되고 정제된 언어들만으로 인터넷을 채운다면 그것은 관리되는 사회입니다. 오히려 퇴화되는 것이지요. 인터넷은 풀어내고 해체되고 열려 있는 공간이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 열림은 스스로의 개념이 정립되는 것조차 거부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소음의 세계 속에서 침묵을 만들어내는 건 아닐까요. 이런 세계야말로 시인들에게는 매우 잘 어울리는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서정성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저 고전적인 미학의 세계가 인터넷이라는 현대의 신화적 상징으로 재구성되고 다시 해체되는 그런 이미지의 언어라면 어떨까요. 분명한 것은 가능성이라는 희망의 기대 지평만이 무수히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느리지 않게 사유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갖게 되는 것이 당대 시인들의 일이라고 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곧 다른 언어 체계를 갖게 된다는 의미겠지요.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재훈:오랜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밖은 벌써 어둑해졌네요.

_ 현대시 2002년 8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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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 아래로 귀환한 오르페우스의 꿈


남진우  이재훈



그 새벽/나는 사과나무 아래 서 있었다//휘어진 가지마다/붉게 익은 심장이 마악 솟아오른 아침햇살을 받아 번득이고/어둠에서 풀려나온 잎사귀 끝에 맺힌 물방울이 후두둑 내 이마위로 떨어져내렸다/어디에도 과수원지기는 보이지 않았다/반쯤 무너진 황폐한 돌담 옆으로/저 멀리 소실점을 향해 늘어서 있는 사과나무들/거기 두근두근 열린 태양의 과실들//나는 손을 뻗어 붉게 익은 심장 하나를 땄다/내 손바닥 위에서 팔딱이는/붉고/동그란/심장/한 입 가득 그것을 베어물자/어디선가 맹렬히 타종소리가 울려퍼지고/보이지 않던 새들이 깃을 치며 일제히 날아올랐다//그 새벽 내가 서 있는 곳은/우물가였다 나는 마른 우물 바닥 저 밑에서 홀로/붉게 빛나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꿈> 전문

만약 광기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로트레아몽 백작의 꿈이 그러하지 않을까. 백작은 새벽녘 사과나무 아래에 서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붉게 익은 심장 하나를 딴다. 그 팔딱이는 심장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살펴본다. 붉고 동그란 심장. 조용히 그 심장을 한 입 가득 베어문다. 어디선가 타종소리가 울린다. 타종소리는 슬픔의 소리일 것이다. 바람이 불어도, 불지 않아도 살아야겠다던 열망의 심장을 한 입 가득 베어문 그의 얼굴엔 슬픔이 묻어 있다. 슬픔이 무언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그 시간은 광막한 어둠이 아니라 새벽이었다. 젊은 날 18세기 외투를 걸치고 외출한 겨울의 슬픈 꿈이 새벽녘 사과나무 아래로 다시 귀환한 것일까.
시인을 만나러 간 날은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다. 비 온 뒤에 부는 바람은 몹시도 싸늘해서 내 입술과 정신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나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를 되뇌이면서 빌딩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좀 얼어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남진우 시인은 따뜻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다.

이재훈 : 우선 등단작인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부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이 작품은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 가장 유니크한 시라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우울한 샹송’, ‘헝가리언 랩소디’, ‘십이사도의 주기도문’, ‘러시아의 설해림’ 등의 시어 사용과 ‘방황’으로 요약할 수 있는 낭만적 몽상으로 미루어보아 서구적인 것에서 시의 모티브를 찾고 있습니다. 등단 전후에 탐독했던 작가들이나 사상가들이 궁금합니다.

남진우 : 나의 신춘문예 데뷔작은 전형적인 문청 시절의 습작품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하겠지요. 젊은날의 우울과 방황, 낭만과 좌절, 동경과 환멸 등이 혼숙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뭐랄까, 지상에 발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자신을 공기의 주민으로 여기고 싶어하는 듯한 감각, 자신의 진정한 삶이 지금 여기가 아닌 어느 먼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이런 것들이 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봐야겠지요. 이것은 습작시절 내가 프랑스 상징주의나 독일 표현주의 계열의 시인들의 작품을 탐독한데서 기인한 면도 없지 않을 거에요. 지금 와서 보면 이런 세계의 한계가 선명히 드러나 보이고 또 그것에 대해 이러저러한 논리적 설명도 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엔 이런 세계에 깊숙이 젖어 있었고 그것이 그 나름의 진정성과 진실성을 갖고 있다고 선험적으로 믿고 있었던 듯해요. 그 당시 시단의 주도적 흐름이었던 민중시나 형태파괴적 해체시에 대해선 이렇다할 매력을 느껴보지 못한 편이었어요.

이재훈 : 제가 처음으로 이 질문을 드리게 된 것은 로트레아몽의 시정신과 선생님의 시정신이 맞닿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로트레아몽이라는 인명만 차용해 왔다고 보기에는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거든요. 로트레아몽의 시정신은 극한의 절대성을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도로르의 노래>는 악이 주제이고 그 악의 성격은 인간성의 부정, 신성모독, 증오, 잔인성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악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일종의 반항정신입니다. 그 반항은 결국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한계와 인간에게 이러한 한계를 덧씌워 준 신에 대한 반항일 겁니다. 그러니까 그 반항의 행위가 불가능한 부분을 끝까지 추구하려고 하는 시정신이라고 한다면 선생님의 시정신도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로트레아몽의 시정신을 당시에 흠모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으로 질문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의 시적 작업 또한 이런 시정신이 계속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되어지는데요.

남진우 : 그런데 지금와서 보면 20대 초반에 로트레아몽을 비롯해서 외국 시인들의 시를 깊이 이해한 것 같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그 사람들의 시 자체보다는 시를 에워싸고 있는 이미지를 소박하게 변형하는 차원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러니까 내 등단작은 제목이 워낙 거창해서 주목을 받은 것만큼이나 욕도 많이 먹었는데(웃음) 그 시가 정작 로트레아몽과 관련성을 맺고 있는 시라고는 할 수가 없죠.

이재훈 : 등단 후 <시운동> 동인 활동을 활발히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시운동>은 민중시의 대척점에서 새로운 경향의 문학으로 시사에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시운동>이 작품 세계에 준 영향이 있을텐데 그것에 대해 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남진우 : <시운동>의 초기 멤버들은 한마디로 바슐라리언들이었다고 할 수 있죠. 나를 포함해서 대다수 시운동 동인들은 70년대 중후반 김현이나 곽광수 등에 의해 집중적으로 소개된 바슐라르의 시학에 심취한 세대였어요. 상상력의 절대적 힘과 이미지의 마력에 대한 바슐라르의 설명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새로운 시적 수사의 창출에 고민하고 있던 젊은 세대에게 일종의 복음처럼 다가왔어요. 물론 이러한 바슐라르의 시학은 당시의 암울한 정치상황과는 길항하는 면이 있지요.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상상력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바슐라르의 명제는 젊은 시인 지망생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어요. 바슐라르의 사상체계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시야를 획득한 지금도 나는 바슐라르에 매혹을 느낍니다. 단순한 이해와 분석을 넘어서 그만큼 시를 “살게” 해주는 이론가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재훈 : 그러면 아직까지도 바슐라르의 상징론이나 몽상의 시학이 시작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가 있겠네요.

남진우 : 몽상을 현실과 관련없는 공상과 망상하고 혼동하지 않는다면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이 글쓰는 사람에게 주는 이해의 폭은 굉장히 넓은 것 같구요. 바슐라르적인 인간 이해, 단순한 문학론을 넘어서 바슐라르가 보여준 인간에 대한 낙관적이고 호의적인 휴머니즘적인 측면도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소중함을 깨달아가는 것 같아요. 또한 그 시절에 김현, 곽광수, 김화영 선생을 좋아한 것도 그 분들이 바슐라리언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분들은 텍스트의 쾌락주의자들입니다. 텍스트가 줄 수 있는 쾌락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음미하고자 했죠. 텍스트의 뼈만 발라내는 게 아니고 텍스트의 살아 있는 유기체의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재생산해 내는 비평가들이었다고 봅니다. 그러한 것이 나의 비평적인 모범이 되었다고 봐요.

이재훈 : 약력을 보면 전북 전주가 고향입니다. 유년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요? 시에서는 유년 시절의 원체험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 최근의 시집 <타오르는 책>의 해사문과 시인의 말을 보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드러나거든요.

남진우 : 전주는 내 정신의 원적지입니다. 아름답고 자그마한 도시지요. 사람들도 억세지 않고 이웃간의 인정도 두터웠고…… 물론 이 도시도 지금은 많이 변했지요. 엄청나게 커졌고 고층 아파트와 자동차로 가득찬, 대한민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도시로 변해버렸어요. 하지만 지금도 그 도시는 내 기억 속에선 어린 시절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던 빛과 향기와 소리로 물들여져 떠오릅니다. 이른 아침 다가공원의 활터에서 시위를 떠난 화살이 상쾌한 대기를 가르고 날아가 과녘에 꽂힐 때 나던 딱 하는 소리가 지금도 내 귀에 메아리치고 있어요. 불가능한 소망이지만,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전주천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보고 싶어요.

이재훈 : 그것을 자아에 대한 집요한 탐구나 천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자기 주변의 자리나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남진우 : 여유라고 하면 굉장히 긍정적인 쪽이고 오히려 슬픔에 가까운 것 같아요.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자비라고 해야 되나요? 단순한 사랑이기보다는 슬픔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그런 느낌인데요. 그러니까 슬픔을 알게 될 만큼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아요.

이재훈 : <타오르는 책>의 해설을 쓴 김주연 선생의 ‘청년 신비주의자’라는 명명은 선생님의 문학 경향을 잘 표현한 말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신비주의’는 비현실적 신비성을 시의 현실로 붙들어 놓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그 현실은 일반적인 개념의 현실이 아니라는 말로 이해됩니다. 분명 선생님의 시는 발 딛고 살아가는 외부세계의 현실보다 정신 활동에서 배태되어지는 존재론적 고민과 몽상이 더 짙게 나타나 있거든요. 어쩌면 선생님에게는 이러한 사유의 공간이 더 절박한 현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진우 : 이런 말 하기는 조심스러운데 김주연 선생님은 내 석사논문 지도교수고 그래서 나에 대해 잘 알고 계신 한편으로 나에 대해 일정하게 어떤 고정된 판단을 갖고 계신 부분이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분이 이야기하는 신비주의는 매우 포괄적이면서 또 신중심주의라는 것과 항상 대비되어 적용되는 개념인 만큼 그리 단순하게 이야기하기는 힘든 것 같아요. 그분에게 신비주의는 가치중립적 개념이 아니라 신중심주의와 비교해서 분명하게 위계적으로 서열화된 가치론적 개념이거든요. 따라서 신비주의에 대한 그분의 설명은 이 용어에 대한 일반적 용법과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김선생님이 지적한 범주를 떠나 신비주의에 관한 일반적 용법에 입각해서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지금의 나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로 생각하지 신비주의자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싶군요. 낭만적 정서와 신화적 상상력이 주조음을 이루고 있는 첫시집과 달리 두 번째 시집부터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 인식과 탐구를 시의 동력으로 삼고자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 하는 점은 또다른 규명을 필요로 하겠지만 말이죠. 아쉬운 것은 내 시 가운데 정치적 모티프나 일상생활에 바탕을 두고 창작된 작품이 적지 않은데 이들 작품이 대개 논의의 사각지대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죠.

이재훈 : 그럼 정치적 모티브를 가지고 쓴 작품은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남진우 : <타오르는 책>에서 <족장의 가을> 1, 2 같은 시들은 사실 김영삼 정권 말기를 그린 것이거든요. 이것이 비판을 의도했다기보다 정치적 모티브가 되어서 씌여진 것인데요. 꼭 어떤 시가 그렇다라기보다는 그런류의 시들이 상당수 있어요. 어떤 것은 정치적 상상력이고 어떤 것은 신비주의를 바탕에 두고 이렇게 딱 나눈다는 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설령 신비주의적인 외관을 가지고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결국 출발은 현실이라는거죠. 이걸 사람들이 종종 건너뛰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신비주의가 나쁘다란 것도 아니고요.

이재훈 : ‘죽음’에 대한 천착은 많은 평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죽음에 대한 집착은 죽음이라는 주제가 가져다주는 인식의 한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죽음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풀 수 없는 주제이지 않습니까. 지식사회학이 가져다주는 합리성의 한계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요. 선생님이 주제로 삼은 죽음은 삶과 대극점에 위치해 있는 죽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식의 가장 극한 상황, 혹은 그 극한 상황을 넘어서려는 방법적 자각으로서의 죽음이겠죠. 이것은 분명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처절한 도전을 감행하는 영혼이 시인이니까요. 이것으로 남진우 시인은 이미 너무 멀리 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죽음의 사유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남진우 : 이 자리에서 죽음에 대한 사변적 논의를 펼칠 필요는 없겠지요. 한가지 분명한 점은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찬 두번째 시집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실린 시편들은 그 나름의 실존적 필연성에 기초해 씌어진 작품들이라는 점입니다. 서른 셋을 전후한 시절에 찾아온 시들인데 그 당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극히 황폐하고 아픈 나날을 통과하고 있었거든요. 시를 통한 죽음의 예행연습이랄까. 내면적으로 에우리디케를 찾아 저승을 편력한 오르페우스의 모험을 추체험해보고자 했어요. 극단까지 가보고자 한 의지의 산물이지요. 이 시집에 나오는 어떤 장면들은 지금도 그것을 쓴 당사자인 나를 무섭게 합니다.

이재훈 : 선생님은 <시의 종말, 종말의 시>(1998)라는 평론에서 ‘시의 종말’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은 90년대 이후의 시적 작업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한 것인데요. 이것은 시의 종말 이후에 또 무엇을 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자기 자신의 물음이자 또한 이 땅에 시를 쓰는 이들에게 묻는 물음처럼 들립니다. 그 글을 쓴 지 2년이 지났는데 ‘발전과 성장의 동학’의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남진우 : 내가 시작노트 형식의 글에서 시가 죽었다고 수사적으로 표현해 놓았더니, 어떤 아둔한 작자가, 시가 죽었다고 하는 자가 왜 학교에서 시를 가르치느냐, 당신 기회주의자 아니냐 하는 식의 시비를 걸어와서 아연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반응이 공식선상에서 제기될 정도로, 시의 종말이니 죽음이니 위기니 하는 수사들은 90년대 내내 지속적으로 유행했고 그래서 이젠 수사로서도 진부해진 감이 있죠. 하지만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진행 중인 공안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지금 이 시대에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시의 죽음이라는 주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이것에 대한 성찰 없이 기계적으로 씌어지는 시가 의미있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죽음이야말로 새로운 시의 탄생을 가능케 하는 최고의 질료일 수 있으니까요.

이재훈 : 많이 받는 질문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선생님은 시인뿐만 아니라 비평가로서도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비평은 상당히 많은 애독자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저 또한 열렬한 애독자의 한 사람입니다. 비평집 <숲으로 된 성벽>의 책 뒷면 글에서 도정일 선생은 “이 척박한 땅에서 한 젊은 평론가가 어떻게 이처럼 빛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는 그 자체로 미스터리이다.”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선생님의 평론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남진우 : 개인적으로 도정일 선생님의 평가는 과분할 따름이고 그렇게 되도록 더욱 정진할 뿐이라고 말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싶습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한마디 하자면 평론 활동을 시작할 무렵 나는 내 평론이 내 시의 부록이길 바랬는데 최근 보니 거꾸로 내 시를 내 평론의 부록으로 받아들이는 이가 적지 않다는 거죠. 그래서 요즘엔 그럴수록 더 열심히 시를 써야 한다는 내면의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이재훈 : 현재 명지대 문창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잖아요. 글 쓰려는 문학 지망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 몇 가지만 말해 주세요.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남진우 :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찢어버리라는 것, 이것 이상 가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이재훈 : 마지막으로 최근에 읽었거나 읽고 있는 책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남진우 : 식민지 시대 시인들의 시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특히 정지용, 오장환, 백석 같은 시인들의 시를 찬찬히 다시 읽으며 많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이들의 시에 대한 좋은 에세이를 쓰고 싶어요. 읽고 싶은 분야는 많아요. 폴 드 만을 비롯한 예일학파의 저작들, 문화인류학 분야의 고전들, 프로이트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책들. 그러나 역시 최고의 선물은 아름다운 이미지로 가득찬 시집이지요. 김언희 박형준 윤의섭 전동균 이홍섭 이윤학 허혜정 고창환 조용미 김선우 박성우 등등의 시들.

이재훈 : 그럼 이것으로 현대시 대담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귀한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대담이 끝난 후 문학동네 사무실 근처의 한정식 집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무래도 그때 내가 너무 조잘거린 것 같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이 무명의 시 쓰는 젊은이에게 보내어주는 미소는 내 마음을 한없이 따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시인의 뒷모습. 더 정확히 말해 시인의 어깨를 보았다. 앞에서 보여지는 남성성이 발현된 어깨가 아니라 뒤에서 보이는 고독한 시인의 어깨… 유유히 사라져가는 시인의 뒷모습과 밤거리의 배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_ 출처 : <현대시> 2001년 1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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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상에서 禪까지



대담자:이승훈, 이재훈(시인)




이재훈 : 선생님의 유년 시절은 불안과 우울의 시간들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셨던 외조부와 한의학을 하셨던 조부, 그리고 의학을 하셨던 부친 밑에서 성장합니다. 외형적으로는 괜찮은 집안의 총명하고 명석한 아이였겠지만, 내면적으로는 외로움과 우울, 불안감 등에 시달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집안의 잦은 이주, 부친의 병, 모친의 자살 시도 등은 집적적인 영향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과 내면적 정황들이 자신의 내면세계를 고집스럽게 파고든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선생님의 천성적 성정性情보다는 외부 환경이 더 많은 영향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승훈:외면과 내면의 아이러니죠. 겉으론 멀쩡하고 이 시인 말처럼 그럴 듯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계속된 건 불안, 공포, 우울이었습니다. 내가 너무 내성적이고 여린 성격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불안은 내 브랜드죠. 난 초등학교 입학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설레이며 학교에 입학하던 추억이 없어요. 어느날 갑자기 낯선 아이들 속에, 그것도 시끄러운 아이들 속에 내가 앉아 있던 기억만 납니다. 무슨 카프카 소설같고 악몽같은 기억입니다. 도대체 이 낯선 곳에 내가 왜 왔는가 ? 그후 알게 된 것이지만 아버지는 나이도 차기 전에 그러니까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가을에 나를 학교에 집어 넣은 것입니다. 낯선 것에 대한 공포는 그후에도 계속됩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6. 25가 나고 난 계속 낯선 곳으로 옮겨 다니고 그후에도 잦은 이사 무엇보다 아버지 병으로 가정은 어둡고 언제 집안이 박살 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며 유년 생활을 보냈죠. 난 어린 시절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어요. 사실 의사이신 아버지가 병으로 고생하신 것도 아이러니입니다.

이재훈 : 위의 질문처럼 생각하게 된 연유는 직접 선생님을 뵙고 든 느낌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감정도 풍부하시고 유머감각도 있으시고 웃음도 많으시고 해서 든 생각입니다.

선생님께는 두 분의 큰 스승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춘천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사였던 이희철 시인과의 만남, 한양대에서 박목월 선생과의 만남이 그것인데요. 두 분과의 만남이 선생님께 끼쳤던 영향이 어떤 부분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승훈:불안과 우울에 지친 셈이죠. 그리고 이젠 나이가 들었잖아요 ? 최근엔 왜 사냐 건 웃지요라고 노래한 김상용 시인의 시가 좋아요. 고교 시절 이희철 선생님을 만난 건 행운이었고 대학 시절 박목월 선생님을 만난 건 운명이라는 생각입니다. 이희철 선생님은 당시 「문학예술」지에 신인으로 등단한 분으로 참 시가 좋았습니다. 고교 시절 난 선생님의 시를 다 외울 정도고 당시 동급생이던 소설가 전상국 형이 말하듯 선생님은 사실 나를 편애할 정도였습니다. 시의 기초가 잡힌 건 선생님의 영향과 지도 때문이고 박목월 선생님은 이미 기초가 다 된 나를 문단에 바로, 그것도 대학 2학년 봄에 내보내신 겁니다. 그러나 목월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내가 없을 정도로 선생님과의 만남은 그후 운명이 됩니다. 난 목월 선생님을 만나려고 이 땅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이재훈 : 이희철, 박목월 선생은 전통 서정계열의 작품 세계가 당신의 문학관이었고 그것을 작품으로 훌륭하게 구현해 낸 시인입니다.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전통 서정시의 반대편에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선생님께서는 스승의 문학 세례에 큰 영향을 받는 우리 문학 전통으로 비추어 본다면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스승의 문학 경향과 반대의 지점에 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승훈:두 선생님 모두 내가 하는 문학에 대해서는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으셨죠. 이희철 선생님은 네가 李箱을 좋아하더니 시가 그렇게 되나 보다라고 하신 적이 있고 목월 선생님은 글쎄 아무래도 이상의 시는 장난 같제 ?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모더니즘 계열 시인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라는 게 모처럼 등단을 시켜 놓으니까 이상, 김춘수, 김수영, 전봉건같은 시인들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니 속으로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셨을까 ? 그런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목월 선생님은 너는 네 길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대가 풍이셨죠.

이재훈 : 선생님께서는 고립감, 외로움, 허무, 불안 등의 삶이 현대인의 조건이며, 현대적인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세계를 불화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고, 이 불화 속에 내던져진 현대인의 의식세계가 모더니즘의 에너지겠지요. 자연인으로서 선생님의 삶 또한 이러한 불화를 스스로 수긍하고 고독한 산책자로 살아가는 듯한 인상을 많이 받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적 태도 이전에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궁금합니다.

이승훈:고독이 낭만주의의 개념이라면 불안은 현대주의, 모더니즘의 개념입니다. 홀로 있기 때문에 고독하고 누군가를 만나면 고독이 해소되죠. 그러나 불안은 다릅니다. 혼자 있어도 불안하고 누구와 함께 있어도 불안합니다. 아니 함께 있는 사람이 갑자기 무서울 때도 있습니다. 물론 정신분석에 의하면 불안은 분리 불안이고 이 불안이 자아 분열로 발전합니다. 사회학적으로는 이 시인 말처럼 자아와 세계의 불화, 단절, 소외가 동기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이런 단절 속에 던져진 현대인의 내면, 곧 불안과 공포가 모더니즘의 에너지입니다. 내가 대학 시절 좋아했던 카프카의 세계가 그렇고 이상의 시가 그렇습니다. 내 시가 그렇다면 내 인생도 그렇고 거꾸로 내 인생이 그렇다면 내 시도 그렇습니다. 시는 속일 수가 없어요. 사실 난 잿빛 인생입니다. 요즘도 불안해서 시를 쓰고 해질 무렵이면 혼자 맥주를 마시고 두통으로 고생이고 매일 두통약을 먹고 감기로 고생이고 매일 감기약을 먹고 우습죠. 고독한 산책자이기 보다는 난 사실 산책같은 건 취미가 없고 여행도 싫고 그저 잿빛으로 삽니다. 무슨 목표도 없고 프로젝트도 없이 그저 하루 하루를 산 게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런 점에서 난 허무주의자이고 정신적 방랑자입니다. 정신적 유목민이라고 할까? 언젠가 이재복 평론가와 대담을 할 때도 그런 말을 했지만 난 그동안 낸 책이 몇 권인지 몰라요. 그래서 조사해보니 50 권이더군요. 그런데 강동우 평론가는 자기가 알기로는 53 권이래요.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겉보기와 달리 속은 엉망이죠.

이재훈 : 선생님의 작품 세계는 자아 탐구로 시작해서 그 시적 대상이 로 변화됨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 시집 「밝은 방」부터는 자아 소멸, 주체 소멸로 바뀌게 됩니다. 자아와 주체가 소멸되면 남는 게 언어이고, 이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시작詩作에 그대로 투영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어에 대한 자율성을 누리게 하고, 스스로 생장, 형질 변화하도록 언어를 방목하는 형식이 하나의 시적 방법론으로 파악됩니다. 하지만 이런 언어를 사유하고 시적 대상으로서의 언어를 질서화시키는 건 결국 주체가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언어주체와의 친화와 길항 관계들에 대해 독자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승훈: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내 시세계는 자아―언어―대상의 관계에서 처음부터 대상, 곧 자연이나 현실을 노래하지 않았어요. 아니 난 그런 대상의 세계엔 관심이 없고 자아에만 관심이 컸고, 따라서 자아탐구의 시를 썼습니다. 이른바 비대상 시입니다. 대상을 상실한 자아는 무의식, 어두운 충동의 세계이고 이 세계는 그후 나/ 너/ 그라는 인칭 체계로 탐구되죠. 그러나 느닷없이 이런 자아탐구가 자아소멸로 전환됩니다. 자아탐구에서 자아가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30년이 걸린 셈입니다. 아니 내가 등단한 게 1963년이고 첫 시집을 낸 게 1969년이니까 시집을 기준으로 하면 25년이 걸린 셈이고. 이 시인 말처럼 1995년에 낸 시집 「밝은 방」이 전환점이 됩니다. 아무튼 자아를 찾는다는 게 이상하게도 자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겁니다.

이제 자아―언어―대상에서 남은 건 언어이고 자아가 없다면 언어가 시를 쓴다는 결론이 나오죠. 이 무렵 자아가 없다는 생각은 불교적 사유가 아니라 언어학, 특히 후기구조주의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거죠. 방브니스트, 데리다, 라캉, 바르트가 그렇습니다. 주체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을 할 때 주체가 탄생하고 말, 언어가 없다면 주체가 없습니다. 그리고 말할 때 말하는 주체와 말 속의 주체가 태어나고 그런 점에서 주체는 두 주체 사이에 있고 주체는 계속 흘러가지요. 난 어제 술을 마셨어 하면 지금 말을 하는 나와 말 속의 나가 태어나고 나는 이 두 개의 나 사이에 있고 말이 계속되는 한 두 체의 관계도 계속 흘러갑니다. 그러니까 실체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주체가 있고 이런 주체는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텍스트적 주체, 해체적 주체, 차연적 주체입니다. 고정된 절대적 실체로서의 주체, 데칼트적 주체는 없고 주체는 차연이 생산하고 차이와 연기가 주체입니다. 말하자면 두 주체는 차이/ 연기의 관계이고 말하는 주체도 그렇고 말 속의 주체도 그렇습니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기표와 기표 사이에 존재/ 부재는 주체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 시인과 다른 생각입니다. 주체가 언어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언어가 주체를 구성/ 탈구성합니다. 요컨대 주체는 해체되는 거죠. 그러나 이렇게 자아소멸, 주체소멸을 깨닫고도 내 시가 계속 불안, 우울, 광기에 시달린 건 정효구 교수의 지적처럼 이 깨달음이 언어학을 매개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재훈 : 「비대상」,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 「비빕밥 시론」 등에서부터 최근 저서 「탈근대주체이론―과정으로서의 나」 등의 시론은 우리 시사詩史에 남을 대표적 시론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시론은 선생님의 시세계와 함께 공존하고 있어서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게 됩니다. 선생님의 시를 좋아하는 많은 독자들은 시가 먼저냐 시론이 먼저냐를 놓고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시론에 의해 시가 탄생됐는지 아니면 시에 의해 시론이 탄생됐는지를 묻는 독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승훈:「비대상」은 말 그대로 대상이 없는 시를 쓰던 초기의 세계를 나대로 성찰한 것으로 그동안 오해도 많았고 말도 많았던 시론입니다. 대상이 사라지고 남은 자아는 무의식적 실체이고, 나는 이런 자아를 노래했습니다. 이상의 「절벽」같은 시가 그렇고 김춘수의 무의미 시론이 의미론을 강조한다면 내 시론은 심리학, 무의식, 억압된 심리적 에너지의 투사를 강조합니다. 나는 이런 세계를 실존의 투사, 외부세계의 무화無化, 언어의 도취로 요약한 바 있습니다. 김춘수의 무의미 시는 묘사적 이미지, 자유연상, 통사해체의 단계로 발전하고 나는 비대상, 자아소멸, 해체로 발전합니다.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 「비빔밥 시론」은 자아소멸 이후에 남은 언어에 대한 사유, 시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전자는 시에는 본질이 없고 언어와 제도만 있다는 것, 후자는 이 언어와 제도의 해체를 다룬 것입니다. 「비대상」이 제 1기를 대표한다면 이 시론들은 제 2기를 대표합니다. 시와 시론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 함께 가는 겁니다. 특히 현대시는 시론을 요구하고 시론은 시를 보는 시각, 입장, 태도입니다. 현대 회화도 현대회화에 대한 시각, 이론, 입장이 없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쓰레기가 회화가 되는 것도 이론, 입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시가 전통 서정시로 퇴행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짓이고 현대시에 대한 시각, 입장, 이론이 분명치 않다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미적 후진성과 통합니다. 도대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나무, 달, 이슬, 꽃, 강입니까 ?

이재훈 : 서구 문예 이론의 한국적 수용에도 큰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현대시사상」이라는 잡지를 주관하시면서 여러 가지 문예 사상과 시적 담론들을 번역하고 그것을 우리 문학에 수용하는 논문들을 생산해 내는 데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저도 습작 시절에 이 잡지를 복사, 제본하면서 공부했던 게 지금도 큰 재산으로 남습니다. 또한 지금 이러한 잡지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서구에서 이제 우리가 수용하고 천착해야 될 사상과 이론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서구 이론을 연구하시면서 가장 큰 인상을 받았던 이론 혹은 이론가로는 누구였는지 궁금합니다.

이승훈:서구는 끝났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의 끝에 동양이 있습니다. 서구 사상은 이론적이지만 동양 사상은 직관적이고 따라서 동양 사상, 특히 노장 사상, 불교 사상, 禪 사상에 대한 현대적 읽기가 요구됩니다. 그런 점에서 계간 「시와 세계」가 표방하는 후기현대와 선의 만남은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사실 많은 문예지, 시지들이 나오지만 뚜렷한 문학적 태도를 표방한 잡지들은 별로 없고 그 많은 시지들이 왜 나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이 낭비지요. 그건 그렇고 예컨대 데리다의 글쓰기가 놀이, 무용성을 강조한다면 장자는 이 놀이, 무용성의 유용성을 강조하고 그런 점에서 데리다가 예술을 강조한다면 장자는 예술과 삶이 하나가 되는 경지를 지향합니다. 데리다의 해체 개념도 유마 거사가 말하는 不二 사상과 비슷하고 다릅니다. 이 차이, 틈, 균열을 파고들 필요가 있죠. 요컨대 서양과 동양의 만남, 회통 그러니까 서양도 아니고 동양도 아닌 잡탕, 비빔밥, 혼교, 난교, 혼혈이 요구됩니다. 개인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론가는 소쉬르, 프로이트, 데리다, 라캉입니다. 소쉬르가 말하는 언어의 기호학적 특성, 프로이트의 무의식, 데리다의 해체, 라캉의 자아 개념 등은 지금도 내 사유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나대로 수용한 것이죠.

이재훈 : 60년대는 선생님께서 등단하신 연대이지요. 당시 선생님께서 몸 담고 계셨던 「현대시」 동인은 새로운 문학적 감수성으로 이념과 경향을 떠난 순수시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30년대 모더니즘 극복과 전후모더니즘의 극복이라는 명제를 안고 있었던 당시에 「현대시」 동인은 가장 주목할 만한 문학 그룹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와는 다르게 현재의 「현대시」 동인들의 면면을 보면 모더니즘적 성격을 고수하며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은 선생님과 함께 김영태, 박의상 선생 정도에 불과합니다. 당시 「현대시」 동인의 영향과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승훈:1960년대 신세대로 구성된 「현대시」 동인은 이 시인 말처럼 1930년대 식민지 모더니즘, 1950년대 전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이른바 산업화 초기 모더니즘을 추구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현대시」는 제 3기 모더니즘에 해당하죠. 30년대가 식민지 시대의 억압된 내면(이상)을 노래한다면 50년대는 실존, 존재(김춘수)를 노래하고 60년대는 산업화 초기의 내면, 갈등을 노래합니다. 60년대를 순수/ 참여로 양분한다면 순수파에 속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순수도 참여도 아닌 제 3의 그룹, 중간파로 봅니다. 중간파는 순수 (전통서정시), 참여(현실비판시) 양쪽에서 욕을 먹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죠. 그러나 서구 모더니즘, 아방가르드는 모두 회색이고 중간파입니다. 비유해 말하면 선거를 할 때 투표 행위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회색입니다. 왜 모두 투표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투표 거부, 기권, 포기는 선거와 제도에 대한 부정이고 아방가르드 정신이 그렇습니다. 새로운 예술은 전통을 부정하고 현실도 부정합니다. 「현대시」 동인은 60년대의 외적 현실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내면을 노래하고 이런 내면의식이 현대성과 통합니다. 어느 세대나 그 세대의 몫이 있죠.

이재훈 : 선생님께서는 김춘수 선생의 무의미시론을 계승해서 새로운 시론으로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받습니다. 그것이 「비대상시론」입니다. 작고하신 김준오 선생은 모더니즘시론을 조향김춘수이승훈의 계열과 김기림김수영오규원의 계열로 이원화할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시적 방법론을 떠나 선생님의 시에 드러나는 내면 정감의 노출구체화는 김춘수보다 김수영과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김수영은 광기의 형태로 드러났다면 선생님께서는 허무의 형태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이것은 국소적인 부분이지요. 선생님께서는 김춘수 선생의 영향과 동시대 시인으로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인 오규원 선생과의 차이와 선생님 시와 시론의 변별성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이승훈:앞에서도 말했듯이 비대상 시론은 김춘수의 무의미 시론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시를 쓰든 그림을 그리든 누구의 영향을 받지 않고는 창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시인들은 이상하게도 나는 누구의 영향을 받았소 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를 쓰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내 사유가 어디 있습니까 ? 내 생각이라는 게 모두 그동안 읽은 책, 들은 소리들의 쓰레기 아닙니까 ? 그런 점에서 내 사유, 독창성이라는 건 없고 내 사유는 쓰레기들의 재활용입니다. 또 선배가 있어야 후배가 있죠. 그런 말을 하는 시인들은 제대로 공부를 안 했거나 선배에 너무 인색한 사람들입니다. 결국 텍스트가 있는 게 아니라 인터텍스트가 있습니다. 모든 텍스트는 상호텍스트입니다. 문학은 인과성이 아니라 상호성이 중요합니다. 김수영은 30년대 이상의 정신, 아방가르드를 계승하고 나는 이상과 김춘수 사이에 있고 그런 점에서 김수영의 광기, 실험을 옹호하는 입장입니다.

김춘수, 이승훈, 오규원이라? 크게 보면 같은 유파에 속하고 그것은 시에서 의미, 대상, 관념을 부정한다는 특성으로 요약됩니다. 김춘수의 무의미 시론은 관념의 제거를 노리는 이른바 묘사적 이미지에서 자유연상, 통사해체로 발전합니다. 오규원의 날 이미지 시론은 말 그대로 관념의 흔적이 없는 날 이미지를 추구하고 그런 점에서 김춘수의 묘사적 이미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합니다. 내가 주장한 비대상 시론은 김춘수의 자유연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만 나는 자유연상보다 액션 페인팅의 논리, 곧 억압된 무의식의 투사를 강조했습니다. 김춘수가 대상의 재구성, 대상과 이미지의 거리를 강조하고, 이때 대상의 의미, 곧 지시적 의미의 소멸을 강조한다면 오규원 역시 이런 재구성, 곧 대상의 날 이미지를 계속 추구하고 나는 이런 대상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요컨대 김춘수, 오규원은 대상을 전제로 무의미, 날 이미지를 추구하지만 난 출발부터 그런 대상이 없고 따라서 나의 내면, 무의식이 문제였습니다. 시의 경우엔 김춘수는 이상과 정지용 사이에 있고, 오규원은 이상과 김수영 혹은 김수영과 김춘수 사이에 있고 나는 이상과 김춘수 사이에 있습니다.

이재훈 : 모더니즘 시사를 조감해 보면 이상으로부터 시작해 조향, 김춘수에서 김영태, 이승훈, 오규원으로 이어지는 큰 흐름이 있습니다. 그 이후 선생님 세대를 영향받은 후학들의 시세계는 조금 다른 성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향관계로 따져야하는가 의심이 들 정도이지요. 많이 거론되는 80년대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등은 자아의 탐색이라기보다 사회성을 가진 의식적 모더니즘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들은 선생님의 작품세계와 일정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90년대 들어서 함기석, 박상순, 송찬호, 박찬일, 김언희 등이 더욱 친밀하게 영향받은 세대가 아닌가 싶은데요. 소위 모던한 시를 쓰는 후학들의 작품세계가 선생님의 영향과 연관짓는다면 어떤 계보와 분류로 특징지어야 할까요?

이승훈:80년대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외에도 최승호, 기형도 등은 60년대 식의 내면이 아닙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내면을 드려다 볼 겨를이 없었고 그런 점에서 과격한 모더니스트들입니다. 정치적 모더니즘, 시장 바닥의 모더니즘이죠. 그러나 최승호, 기형도가 온건한 모더니즘이라면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은 아방가르드입니다. 이 시인 말처럼 난 이들 보다는 90년대 모더니스트들이 친척 같아요. 이재훈, 정재학도 이 계열입니다. 이유는 80년대가 외적 현실을 대상으로 한다면 90년대 신세대는 내적 현실, 말하자면 현대인의 악몽을 노래하고 이런 악몽, 그로테스크의 세계는 초기 내 상상력과 통하고 내가 생각하는 우리시의 현대성을 이들이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우리 모더니즘의 제 5기에 해당합니다. 비슷비슷한 시들이 판을 치는 우리 시단에 이만한 개성, 이만한 재주, 이만한 전위를 만날 수 있다는 건 기쁨입니다. 이들은 대체로 30년대 정지용, 김기림의 온건한 모더니즘이 아니라 이상의 과격한 모더니즘, 곧 이상적 아방가르드를 계승하고 그런 점에서 이상의 후예입니다.

이재훈 : 저는 우리 시사의 모더니즘적 특성 중 초현실적인 시적 방법은 실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예전에 이상 시의 계보를 작성하시면서 분류하신 게 초현실주의의 기법, 다다이즘의 기법, 미래주의의 기법, 입체주의의 기법인데요. 우리의 형식 실험은 다분히 말 그대로 실험의 차원에서 끝난 예가 많습니다. 깊게 들여다보면 형식 이외의 것들은 모두 형식의 무게에 눌려 무위의 경험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지요.

선생님의 시에는 의식이 형식에 구속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시를 작은 사각형 안에 문자를 가두는 형식을 보면, 형식에 대한 깊은 관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시 형식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은 선생님 시를 이해할 때 중요한 부분의 하나로 생각되어지는데요.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승훈:실패도 있고 성공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서구의 시적 방법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고 어디까지나 굴절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서구 방법을 모델로, 무슨 공식처럼 적용해선 안되죠. 어떻게 20세기 초 프랑스를 모델로 지금 이 땅의 시를 평가할 수 있습니까 ? 수용은 수입이 아닙니다. 일종의 대화이고 굴절이고 변주입니다. 그건 그렇고 난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고 아니 형식이 내용이라는 입장입니다. 결국 시는 형식, 형태, 스타일이고 그런 점에서 난 형식주의자이고 스타일리스트이고 스타일리스트는 허무주의자입니다. 기댈 곳이 없어요. 현실도 대상도 의미도 본질도 없습니다. 언어가 있어서 시를 쓰고 언어는 현실이 아닙니다. 허깨비, 환상, 떠도는 기표입니다.

그러므로 시가 있는 게 아니라 시라는 형식, 형태가 있습니다. 시는 결국 낱말들을 이상하게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조가 그렇고 자유시가 그렇죠. 그동안 시를 써 오면서 제일 괴로운 건 형태였습니다. 이 시인 말처럼 별 놈의 형태를 다 시도해보았죠. 그동안의 시쓰기는 형태 변화였고 그것은 연구분이 있는 시, 산문시, 연 구분이 없는 단련시, 낱말 하나가 시행이 되는 길고 가느다란 시, 산문시 변형, 사각형 형태, 직사각형 형태, 그리고 최근에는 다시 자유로운 산문시로 변합니다. 형태에 지치고 새로운 형태를 생각하고 다시 지치고 그런 식입니다. 물론 형식과 형태는 다르지만 크게 보면 같고 그러니까 그동안의 시쓰기는 형식, 형태, 언어를 파괴하고 다시 구성하고 다시 파괴하고 다시 구성하는 일. 그러니까 언어 놀이죠. 사는 게 재미 없잖아요 ?

이재훈 : 김춘수 선생의 시적 흐름이 의미에서 무의미로 다시 변증법적 통합을 거친 의미로 되돌아왔다는 것으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아 탐구, 자아 소멸로 철저하게 자아와 싸워온 고투의 흔적으로 보여집니다. 대신 변화하는 내면의 운동성을 이성으로 파악해 보려는 의지가 시적 대상의 전이轉移를 통해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시집 「인생」을 기점으로 선생님의 시세계가 선적인 세계로 옮겨갔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것은 선생님의 사유 활동이 현재 선세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논리를 넘어서서, 선생님의 작품 세계의 새로운 돌파구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선적인 세계가 선생님의 시세계의 새로운 지향점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승훈:이 시인 말처럼 김춘수는 의미에서 무의미로 다시 변증법적 통일로서의 의미로 돌아왔습니다. 아니 돌아온 게 아니라 지양되고 발전되었습니다. 나는 자아탐구에서 자아소멸의 단계를 거쳐 이 시인 말처럼 시집 「인생」(2002)을 기점으로 禪의 세계, 선적인 세계로 전환합니다. 아니 전환보다는 발전이나 초월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아소멸, 주체소멸을 주장하면서도 내가 자아로부터 완전한 자유나 해방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언어학, 특히 후기구조주의를 매개로 했기 때문이고 그건 이론이고 따라서 이론과 실천 사이에 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불교, 그것도 선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나로서는 너무 늦은 법연이지요. 90년대 후반 어느 봄날 진주 장모님 49제가 하동 칠성암에서 있었고 그때 금강경을 만났고 그때 처음 내가 펼친 부분이 대승정종분이고 거기서 보살은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을 버려야 한다는 부처님 말씀이 나와요. 특히 아상을 버리라는 말씀이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아탐구니 자아소멸이니 하는 게 결국은 아상에 대한 집착이니까요. 자아는 相이고 想이라는 것. 부처님의 이 말씀과 만나고 나서 한결 가벼워지고 그후 無我, 無住, 不二, 空같은 개념들이 내 사유를 지배하게 됩니다. 시집 인생은 이런 사유들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선이 강조하는 것은 있음/ 없음을 초월하는 공이고 자유이고 해방입니다. 올해 낸 시집 비누에서는 이런 인식을 좀더 자유롭게 노래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자아탐구에서 자아소멸을 거쳐 마침내 자아불이로 발전했고 자아 있음(자아탐구) / 자아 없음(자아소멸)의 대립이 변증법적으로 종합되고 아니 선은 종합이 아니므로 있음/ 없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공, 불이의 세계로 나간 셈이지요. 불이나 공은 이런 유/ 무를 초월하는 세계이므로 나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나는 너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不二 사상, 요컨대 무슨 분별, 대립이 지겹습니다. 최근에 쓰는 시들은 시와 삶의 경계를 깨는 작업이고 시와 삶 역시 불이의 관계에 있고 이젠 시를 쓰려는 생각도 버리고 시를 쓰고 아니 밥 먹는 게 시이고 아이들 가르치는 게 시이고 낮잠 자는 게 시라는 생각입니다. 삶과 시의 경계 뿐만 아니라 시와 비시의 경계도 깨야 합니다. 따라서 이젠 삶에서도 시에서도 한 결 자유롭습니다. 요컨대 시는 없고 시라는 것이 있고 이 시라는 것, 정의, 명명도 허상입니다.

결국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바르트는 선에 대해 말하면서 필름을 넣지 않고 셔터를 누르는 카메라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내용, 의미, 기의 없이 사물을 보는 행위지요. 삶에 무슨 본질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까 ? 결국 그저 있는 것, 그저 사는 것, 그저 쓰는 것이지요. 이 그저가 중요합니다. 그저 배 고프면 밥 먹고 술 생각 나면 술 마시고 잠이 오면 자는 겁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쓰고 결국 삶이 시이고 시가 삶입니다. 나는 선을 만나고 시의 새로운 돌파구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셈입니다. 그러나 나는 불자도 아니고 그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는 글쟁이입니다.

이재훈 : 본 대담은 그간 있었던 선생님의 시적 작업을 큰 줄거리를 통해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해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많은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답변에 큰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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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배한봉, 이재훈



무엇인가를 주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떤 방어력을 가지고 있어야 설득력 있는 일이다. 방어력은 어디로부턴가 공격받을 때 생기는 에너지일 것이다. 나는 배한봉 시인과 대담을 진행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주장과 그 방어력은 어디로부터 나왔는가가 궁금해졌다. 언어는 자연의 부르짖음에서 출발한다는 루소의 언명은 이를 잘 뒷받침해 주는 말이다. 물론 이는 언어의 기원에서 비롯된 말이긴 하지만 지금의 진화된 언어도 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곤 한다. 굳이 물질문명 사회의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 얘기하지 않더라도 자연만큼 인간에게 큰 스승은 없다. 이미지도 그 이미지를 파생한 어떠한 기교도 날 것 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자연친화적이다. 문명사회가 자연친화적인 기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더 증폭될 것이다. 실리콘벨리의 많은 과학자들이 자연주의자라는 점이나 동양뿐만 아니라 미개발지에 대한 관심, 레오폴드나 소로우,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스콧 니어링 같은 이들에 대한 애정어린 찬탄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환경 문제가 날로 심각해져 가는 작금의 상황에서 인간이 자연에 가한 가혹성의 무모함은 더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제정복자로서의 인류 역사는 새로 쓰여져야 한다. 개인적으로도 자연주의자들 앞에서는 그 어떤 합리화의 방편이 생각나지 않는다. 결빙으로 정제시키는 맑고 투명한 저 힘 앞에 무릎꿇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외로움에 대한 고백은 너무나 절실한 울림이기 때문이다.

배한봉 시인은 경남 창녕에서 서울로 올라와 주었다. 그와 하룻밤을 같이 지내면서 자연에 대한 애정은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또한 깨달았다.

이재훈:지금 우포는 어떻습니까. 이제 봄기운이 완연했을 텐데요. 습지라는 특수한 환경이 가지는 생장군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포에는 완전히 봄이 찾아왔죠?

배한봉:우포의 봄소식은 늪 가장자리의 둑과 근처의 밭이나 논두렁에서 먼저 만날 수 있습니다. 냉이, 토끼풀, 고랭이, 소루쟁이, 개망초 등이 싱그러운 봄빛을 안겨주죠. 얼마 전부터 창포나 갈대, 부들 같은 식물과 갯버들이 새순을 밀어 올리기 시작했으니까 미구에 자운영꽃, 제비꽃 등의 꽃잔치를 만날 수 있겠네요. 이 무렵이면 소금쟁이, 물댕땡이, 물방개, 게아재비들이 수면에서 봄을 환호하며 춤추는 것도 함께 볼 수 있을 거예요.

이재훈:독자들을 위해 경남 창녕의 우포늪을 간략히 소개해 주세요. 우포늪을 지키기 위한 민간 단체들도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배한봉:우포늪은 1억 4천만년전 중생대 전기 백악기 때, 우리나라 지형의 탄생과 그 기원을 같이 하는 국내 유일의 자연 늪입니다. 현재 우포늪은 우포, 목포, 사지포, 쪽지벌 등 4개의 늪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서울 여의도와 맞먹는 70여만 평에 달하는 이 광활한 곳에는 1천여 종의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수서 식물의 보고(寶庫), 살아 있은 곤충박물관, 철새들의 낙원으로 불리기도 하죠. 여름이면 창포와 갈대, 생이가래, 개구리밥, 마름, 자라풀 등이 늪을 거대한 초록융단으로 만들지요. 또 여름 장마가 지난 뒤부터는 지름이 2~3m에 달하는 가시연이 꽃을 피운답니다. 잎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운 이 장관을 놓치지 않으려고 전국에서 많은 시인, 화가, 사진가들이 몰려들더군요. 겨울엔 기러기, 고니, 오리류 등의 철새들이 생동감 넘치는 군무를 펼칩니다. 4계절 내내 생명잔치가 끊이지 않는 곳이 바로 우포늪이랍니다. 관련단체는 창녕환경운동연합푸른 우포 사람들 등이 있습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이력을 보면 등단은 좀 늦은 편이지만 일찍부터 작품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 박재삼 선생으로부터

「경인문예」로 추천을 받았지만 잡지의 폐간으로 불우한 문학환경을 겪다가 다시 재등단 하지 않았습니까. 「경인문예」로 등단한 시절부터 재등단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셨을텐데요. 선생님의 문학적 연대기라고 할까. 그런 것들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배한봉:오래 전 이야기를 하려니까 많이 쑥스럽네요. 처음엔 소설을 쓰고 싶어했죠. 고교시절 학생잡지의 학생작품공모에 단편이 당선되었던 것이 계기였죠. 그러다가 84년 서울살이 시절에 박재삼 선생님을 만나면서 시로 바꿨지요. 그때 선생님의 후배가 관여하던 그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는데, 두어 번 더 나오다가 그만 폐간돼버렸어요. 별로 유명한 잡지도 아닌데다가 또 그 후 열심히 신춘문예를 준비했지만 몇 번인가 최종심에서 탈락하고는 상심해서 시를 쓰지 않았지요. 80년대 후반에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와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시가 안 되더군요.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동인활동을 하며 습작하다가 93년에 다시 박 선생님 추천을 받았는데, 이번엔 문단에서 그 잡지를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시를 써놓아도 발표할 곳이 없었으니까요. 처절한 좌절감에 사로잡히던 그런 때였어요. 다시 두 번인가 신춘문예에 도전했는데 또 최종심에서 떨어졌어요. 그동안의 작품을 다 버릴 수는 없으니까 이젠 시집이라도 한 권 묶어놓고 독자로 남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시전문잡지를 고르고 골라 신인상에 응모했는데 마침 당선이 되었어요. 벼랑 끝에 서 있는 내게 마지막으로 다가온 생명줄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될까요?

이재훈:선생님의 시는 기본적으로 서정의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서를 객관적 상관물을 빌어 표현하는 것은 시가 발생한 이래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방법론입니다. 이는 서정의 힘이 바로 시의 본질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시의 양식적 변화는 분명 필요하다고 봅니다. 인간 삶의 양식이 변한 만큼 시의 양식도 변하기 때문이죠. 시의 양식적 변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배한봉:맞습니다. 인간 삶의 양식이 변하면 자연스레 시의 양식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변화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시인들의 의식이 인기나 유행을 좇아가서는 안됩니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확고한 자기 신념이 있어야 됩니다. 저도 습작시절엔 여러 형식을 실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하나도 없지만…(웃음) 인기나 유행이 한순간이듯 인기시․유행시는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제 스승님의 간곡한 가르침이기도 한 이 점을 저는 가장 경계합니다. 유행에 휩쓸리거나 인기를 얻기 위해 고객의 입맛에 맞춰 생산하다보면 시의 큰 미덕인 진정성에 결함을 갖게 되고 생명성을 잃게 됩니다. 이것은 고정관념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시인은 늘 새로운 세계를 향해 오감을 열고 있는 존재니까요. 그리고 또 시인으로써의 자기 세계관이 없어집니다. 세계관이 없는 시인이 생명력 있는 시를 쓸 수 있겠습니까? 좋은 시와 인기시․유행시와의 변별점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어떤 세계관으로 무엇을 어떻게 노래할 것인가는 그 시인만의 개성이고, 또 특질이 될 것입니다. 시의 양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인의 의식 아닐까요.

이재훈:제가 이 질문을 드리게 된 것은 선생님 시의 특질을 말하려고 하다가 선생님의 생각을 우선 듣고 싶어서입니다. 우선 선생님의 시는 자연에서 대상을 찾고 있고 그것을 운용하는 방식도 아주 세밀한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 시의 특질은 방법론적인 것보다는 시가 추구하는 정신적인 특성에서 찾아질 것입니다. 우선 배한봉 시인은 자연주의자다 라는 말에 동의하십니까.

배한봉:자연주의자이긴 하지만 문명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자」에서 19년 동안이나 칼을 갈지 않고서도 신들린 듯 소를 잡고 살점을 발라냈다는 포정(庖丁)의 기즉도(技卽道)를 자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문명세계를 어떻게 읽고 노래할 것인가 하는 점을 많이 생각합니다. 컴퓨터나 모든 기계들의 구조를 꿰뚫고 틈없는 데서 틈을 보는 포정의 칼날 같은 기즉도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곧 세계와 문명에 대한 재해석과, 가치관과 세계관에 대한 사고 양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자는 것입니다.

도로나 루소 그리고 헤세가 기계문명에 반기를 들고 자연을 찬미했던 것은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 절실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풍요한 물질문명의 공허는 오늘의 우리를 고향을 상실한 실향민으로 방황하게 합니다. 가난에 찌들린 과거의 시골, 현실적 고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의 가족적 공동체로 엮어주는 이상적 삶의 고장인 이상향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이나 플라톤의 공화국, 헤세의 나무들 등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바로 유토피아의 가장 필요한 조건을 말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도 이런 이유 때문에 자연에서 대상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니까요. 전통적 방식을 선택한 것은 제가 추구하는 양식이나 정서적 호흡, 체질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과 잘 맞기 때문이죠. 또 한 가지는 전통적 방식 속에도 분명 새로운 것이 있다는 점이지요. 많은 시인들이 이미 낡았다고 던져버렸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새로운 감동이 살아 있습니다.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랄까 깨달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라의 불상이나 석탑을 보고 21세기를 읽어낼 때의 그 팽팽한 긴장, 그 팽팽한 힘과 같은 것이죠.

이재훈:근래에 지겹게 떠돌던 담론 중의 하나가 생태시 논의였습니다. 그것이 물질 문명사회의 한계에 대한 대안적 가치로서는 분명 옳은 것입니다. 문제는 반성적인 사고 없이 우후죽순으로 그것을 지향하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반성적 사고가 없는 작품은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첫 시집 「흑조」의 자서를 보면 땅의 정기와 신령스러움, 순결성은 언제나 내 경외의 대상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선생님의 농경사회가 가지는 땅에 대한 믿음이 반성적 사고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고 생각됩니다. 작품 속에서도 그러한 부분들은 잘 드러나 있지요. 특히 「멸포」, 「화천리의 가을」, 「낙안읍성시편」 같은 작품을 보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 세대의 고민과 역사적 고민까지도 아우르려는 면모가 보입니다. 자연에 대해, 땅에 대한 화두가 나오기까지의 정신적 추이를 듣고 싶습니다.

배한봉:저는 낙동강변의 농촌에서 태어났고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고향 마을은 풍요로운 들판과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과 더불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낙동강이 홍수로 범람할 때면 그 풍요로운 들판이 침수되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는 일인(日人)들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던 불행한 세대가 바로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였습니다. 그 후, 우리 세대는 별로 실감 못하지만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시작한 새마을 운동 바람이 불면서 신작로가 생기고 관개사업을 벌였고, 90년대 우리의 농촌은 농공단지가 조성되면서 황폐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농촌의 도시화는 옛날과는 다른 삶의 풍요로움을 안겨준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릴 때 보았던 자연에 대한 겸손과 대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 일에 대한 신명보다는 그저 삶을 위한 맹목이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하더란 것입니다. 도시생활을 해보니까 그런 것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더군요. 첨단 기술 문명은 비정한 경쟁과 투쟁을 강요하잖아요. 그 속에서 쟁취한 물질적 성공 뒤에 숨겨진 고독하고 공허한 문명의 실존은 물질적 세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적 무거움의 고통이고, 유토피아에 대한 상실감이고, 인류 미래의 실상을 알몸으로 보여주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 더 절실하다고 봅니다. 경제 지상주의적(물질적) 가치관과 인간 중심의 윤리관(개인주의적 인생관)은 정복과 굴복, 승리와 패배의 원리가 지배하는 인간관계를 형성시켰으니까요. 여기서 저는 인간과 자연’, 삶과 정신이 교감하고 하나로 조응하는 큰 질서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자연에 대한 정복의 이념이 지배해온 인간 중심주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발레리나 토인비가 말한 문명의 죽음을 우리 세대나 우리 자식들 세대에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이것은 곧 인류의 미래이기도 하죠. 시는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구원의식 같은 게 있다고 확신해요. 제가 시의 방법론적인 것보다 정신적 면을 더 중요시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질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변모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공생적 삶으로 가는 한 출구로써, 그리고 민족연원에 가 닿는 한 표상으로써 자연과 대지가 와 닿았던 거예요. 이것이 향토적․토속적 정서와 만나면서 정신의 축을 이루게 된 것이지요.

이재훈:자연을 대상으로 사용할 때 중요한 것은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향토적․토속적인 정서가 정신과 맞닿는 지점이지요. 요즘은 병든 자연을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까지도 병들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물질문명의 폐해를 말하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선생님의 시는 자연의 긍정적인 부분들을 들추어냅니다. 이번에 발표한 「가시연꽃」이나 「얼음꽃」은 아픔을 통해서 아름다움에 이른다는 자연의 섭리와 삶의 이치가 잘 조화된 시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에게는 자연이 거대한 스승인 거지요. 선생님 시의 변별점은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겁니다. 자연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직접 자연 안에서 생활하고 체험한 삶의 산물이니까요. 제 개인적으로도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투사로서 자연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연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을 통해 자연을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의 몇몇 시들 중에 자의식이 너무 강한 인상을 받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자연을 완벽한 교훈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배한봉:아주 예리하시군요.(웃음) 가끔씩 저도 그런 점 때문에 망설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포늪 근처에 우거를 마련하고부터는 오히려 담담해졌습니다. 첫 시집 「흑조」가 대개 낙동강변의 삶이었다면 최근의 시들은 우포늪과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체험(체험을 통한 상상력)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체험 없는 상상력은 엉터리 환상을 심어줄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무엇인가에 대한 열망이 체험을 만들고, 그것이 육화되었을 때 시를 탄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절실함, 달리 말해서 구체화된 자기 내면의 소리가 상상력이라는 날개를 달고 비상했을 때 시의 진정성을 확보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선험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다양한 경험을 통해 축적된 사유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이런 상상력이나 사유체계가 詩로 태어났을 때는 이미 외부의 여러 가지 소산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협심증에 걸리거나 흑보기[斜視]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 역시도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투사로서 관점을 만들고 바라보는 것은 경계합니다. 다만 그것이 육화되었을 때는 이데올로기라기 보다는 삶 그 자체이고 거기서 발생한 에너지를 분출해 내다보면 그게 이데올로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시인들은 이렇게 산 체험을 통해 육화된 에너지의 분출과 재생성과정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자기 세계관을 확장시켜 나간다고 봅니다. 기왕 이데올로기 문제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요, 자연은 단언컨대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우리가 별을 바라보고 헤아리는 것조차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립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 이 우주의 순환질서는 스스로 그러함(自然) 그 자체로 보아야 합니다. 자연조차도 정복할 수 있다는 인간중심주의적 횡포가 얼마나 어리석고, 결국에는 얼마나 무력한가를 깨달을 수 있는 존재도 역시 인간입니다. 문학 담론에 있어서 생태시, 혹은 생명시 논의가 무성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연유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논의가 일회성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져 가기를 바랍니다. 자연은 우리 모두에게 거대한 스승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육화시킬 수 있다는 것, 저는 이 열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재훈:여담입니다만, 계속해서 우포늪에 사실 생각이십니까?

배한봉:현재는 다른 곳으로 이사할 계획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살이는 늘 가변적이잖아요. 전에 창원에 살 때도 그랬지만 어디 가서 살던지 간에 늘 손에 흙을 묻히면서 살 겁니다. 현재 고향에 있는 조그만 과수원 농사도 계속 지을 거고, 아이들에게도 대지적 삶을 체험하도록 계속 도와주고 싶군요.

이재훈:마지막으로 정신의 또 다른 한 우주를 창출하기 위해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배한봉:시인은 창조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작년 늦가을에 제 홈페이지를 만들면서 이런 산문을 남겼습니다. 저는 햇빛을 퉁기는 잎들의 가락과 조응하면서 그 자체로 생명인 것들, 또는 툇마루 판때기에 배인 시간과 같은 것들에 혈육의 정을 담아 노래하려 합니다. 새로운 좌절과 치열하게 싸움도 하면서 정신만큼은 살아 있는 그런 시, 그런 시인이 되도록 용맹정진(勇猛精進), 또 勇猛精進할 것입니다. 절벽과 절벽 사이의 길, 이 길 위에서의 목마름, 이것이야말로 창조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즐거운 고통이며, 또 다른 한 우주로의 변신이 시작된다는 증표일 것입니다. 우포늪은 앞서 이 시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연을 통해 삶의 이치를 다시 깨달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이 거리를 좁혀 준 것이지요. 그래서 틈날 때마다 늪길을 산책하고 명상하고 늪에 사는 무수한 생명체들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지요. 마치 똑 같은 대지에 돋아난 풀이지만 작년 봄의 풀과 올해의 풀이 다르듯이 정신의 영역도 그렇게 변하는 것이겠지요.

이재훈:이것으로 현대시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오랜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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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이재훈






대여(大餘) 김춘수 선생은 지난 2004년 1월 <김춘수 시전집>(현대문학 刊)을 상재하셨다. 이 시선집은 1152쪽의 방대한 분량으로 그간 60여년 가까이 해오신 문학 활동을 총결산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시선집에 그치지 않고 <김춘수 시론 전집> 1, 2권을 연이어 냄으로써 김춘수 문학의 총체적인 정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김춘수 선생은 4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한국 문학의 한 경지를 이룩한 시인이다. 관념시와 무의미시, 그리고 이 둘의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의미로 되돌아오기까지 선생의 문학적 역정은 언제나 가장 문제적이었으며 또한 독특한 경지에 스스로 계셨다. 특히 이번 전집 출간은 선생의 미발표작 뿐만 아니라 최근 발표작까지를 모두 담은 것이어서 그 의미는 각별하다. 2004년 3월 15일. 김춘수 선생을 찾아 뵙고 선생께서 그 동안 살아오신 삶과 문학을 육성으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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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선생(1922~2004) (C)현대시


풍경

선생은 건강해 보였다. 성남시 분당구 까치마을의 한 아파트. 나는 몇 번 헤맨 후에야 선생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약속 시간에는 늦지 않았다. 아파트 바깥의 풍경과는 다르게 선생의 집안 풍경은 한가로웠다. 마치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의 별장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거실에는 선풍기 모양의 회전하는 전기난로가 돌아가고 있었고 선생은 무릎 위에 담요를 올려놓고 앉아 계셨다. 우리가 들어가자 선생은 일어서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선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여전하였고, 오후의 햇살이 베란다와 거실의 경계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내가 등단을 하고 난 후 선생의 모습을 제일 처음 뵌 것은 어느 시상식장에서였다. 김춘수 선생이 저렇게 정정한 모습으로 내 앞에 있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내게 선생은 늘 교과서와 책들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화였다. 그 큰 그늘 속에서 잠시뿐이지만 함께 숨쉬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나는 선생에게 무슨 말을 던질 것인가. 그냥 편안한 옛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선생은 분당의 집에서 외손녀 두 명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외손녀는 서울의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새벽에 나가 늦은 밤 귀가한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번 밖에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했다. 낮에는 가정부가 와서 집안일을 돌봐주고 있었다. 동행한 <현대시> 원구식 주간은 곧이어 작년에 처음으로 치러졌던 <현대시 통일마라톤대회> 얘기를 꺼냈다. 작년 임영조, 김강태 시인의 죽음으로 촉발된 통일 마라톤대회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시단의 행사였다. 올해 행사 때에는 시단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함께 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씀드리니 선생은 옳다고 반갑게 말씀하셨다. “문단도 정치하는 사람들처럼 갈라지지 말고 화합하고 어울렸으면 좋겠습니다. 경향이 다르다고 사람까지 갈라지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경향은 다 제 각각 다를 수 있는 거지요.”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인터뷰하러 간 날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신문을 통해, 탄핵과 관련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다는 얘기를 귀동냥으로 들을 터여서 그것부터 여쭈어 보았다.

김춘수:중앙일보에서 전화가 왔어요. 나는 앙케이트하는 것인 줄만 알았지 내 이름이 나오는지는 몰랐지요. 각계 원로를 대표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크게 나왔습디다. 그런 줄 알았으면 내 생각도 가다듬고 신중히 말할 것을… 하지만서도 근본은 같으니까 뭐. 어느 쪽이 잘했는가 잘못했는가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다. 사태 자체가 불행한 일이다. 그런 조의 말을 했지요.

선생은 정치에 대해 특히 노무현 정부에 대해 몇 마디의 말씀을 더 하시려다가 이내 말문을 닫으셨다. 이런 인터뷰 자리에서까지 정치얘기를 하고 싶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구름과 장미

연보를 보면, 선생의 유년에서부터 학창 시절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통영에서의 유소년의 시기, 두 번째는 서울 경기중학의 시절과 일본대학의 시기, 마지막으로는 일본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이다.

선생은 1922년 경남 통영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다. 유복한 가정환경과 개방적 사고를 가진 부친 때문에 그 당시 유치원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때 체험이 시인에게 각별하게 다가온다. 유년시절의 삶에서 선생에게 가장 기억나는 체험은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에서의 경험일 것이다. 그 체험이 독특한 시적 세계관과 미적 관심에 대한 최초의 자각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미 시집 <거울 속의 천사>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다시 한번 자세하게 알고 싶어졌다.

김춘수:자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무렵의 정서적인 체험이 오랫동안 잠재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영향이 큰 것으로 봐야지요. 간혹 그때 얘기가 내 시에도 나오거든. 그때 교회체험이라든가 선교사가 밖에서 앉아 있는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호주의 선교사가 경영하는 미션 계통의 유치원에 다녔다고 하는 것이 에그조티즘(exoticism, 이국정조-필자주)을 준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나고 나니 큰 자극이 된 것 같아요. 선교사 아들 딸들의 파란 눈이 생각납니다. 유치원의 경계가 탱자나무 울타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탱자나무 틈으로 들여다보면 간혹 우리 또래의 서양 남매가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요. 눈이 파래서 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쪽 세상은 이쪽과 다를 것 같았지요. 바람도 구름도 다를 것 같고. 그때 장미라는 꽃을 처음 봤어요. 그 남매가 작은 삽을 가지고 장미를 심는 장난을 하고 있어요. 그때 참, 이상한 꽃도 있구나 생각했지요. 모든 게 낯설었지요. 그때 호주라는 말을 들었는데 바람도 구름도 모두 호주에서 가져온 것 같았지요.

선생의 말로 미루어 보면 독특한 미의 관심을 알 수 있다. 통영은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을 대표하는 고장인데 선생이 체험하고 기억하는 것은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이다. 이것은 선생이 생래적으로 우리가 한국적 혹은 민족적이라고 부르는 여타의 미적 가치관과 차별됨을 말해준다. 선생의 첫 시집 <구름과 장미>는 이런 자각의 은유적 표현이다. 우리의 토속적인 생활환경에서 오는 정서와 이국적인 정서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구름’은 유치원 담 바깥, 즉 생장 본거지로서의 통영이다. ‘장미’는 유치원 안쪽, 즉 그곳에는 바람도 구름도 다를 것 같은 관념의 세계이다. 장미에 대한 선생의 체험이 고스란히 시집의 표제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통영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경기중학에 입학한다. 경기중학 시절에 대해 잘 몰랐는데 마침 선생은 뜻밖의 얘기를 해주었다.

김춘수:경기중학이 당시에는 5년제였습니다. 5학년 2학기 때 조금만 있으면 졸업이었는데 담임선생과 트러블이 있었지요. 이거 말하기가 참 쑥스러운데… 국민감정하고 연결된 것이지요. 그 당시엔 대부분이 일본 선생이었지요. 굉장히 역겨웠어요. 학교 가기 싫고… 그게 5학년 2학기 때 폭발한 거지요. 담임은 내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겠지요. 선친께서도 많이 나무라셨습니다. 동경으로 가서 학교를 알아보는데 중학 4년만 수료하면 대학 예과에 갈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는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대학에 가는 코스였습니다. 왜 제국대학 코스인 고등학교에 가지 않았느냐 하면. 식민지 학생이 일본의 고등학교에 가려면 모교 담임의 소견표가 필요합니다. 그 소견표가 사상적인 내용을 담는 것이었지요. 그게 첨부돼야 원서 제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담임이 그걸 안 써주었어요. 중학을 마치고 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험시기도 놓치고, 내년이 된다고 해도 그걸 써주기는 만무하고. 그러다가 마침 소견표가 필요없는 대학에 가게 된 것이지요.

선생은 당시 담임선생과 민족적인 감정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선생은 이 대목에서 자세히 말하기에는 시간이 없으니 다음 기회에 하겠다고 하셨다. 선생이 일본대학에 처음 입학할 때에는 법학과를 지망했다. 그것으로 보면 당시에는 문학을 하고 싶은 절박함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이 당시에 릴케를 만나게 된다. 릴케와의 만남에 대해 <두 번의 만남과 한 번의 헤어짐>(<의미와 무의미>, 문학과 지성사, 1976)이라는 글에서 고백하고 있다. 그 글을 보면 일본에서 대학 입학하기 전 고서점에서 릴케를 만난다. 그때 만난 릴케의 시는

사랑은 어떻게 너에게로 왔던가

햇살이 빛나듯이

혹은 꽃눈보라처럼 왔던가

기도처럼 왔던가

― 말하렴!

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

내 꽃피어 있는 영혼에 걸렸습니다.

와 같다. 선생은 릴케가 하나의 계시처럼 왔다고 했다. 이 만남으로 선생은 예술대학의 창작과를 선택하게 된다. 또 한번의 큰 만남은 해방 이후이다. 그때 릴케의 시와 <말테의 수기>를 다시 읽게 된다. 이후 선생의 초기시는 릴케에게 큰 영향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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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춘수 선생 분당 자택(2004)


역사허무주의자

일본대학 시절 천황비판으로 옥살이를 한 경험은 최근 일간지 기자들과 나눈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대학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추방되어 퇴학당하고 한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선생에게는 기질적으로 독립운동이 맞지 않는다. 한 개인의 실존이 역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게 선생의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당시의 체험에 기인한 바가 크다. 특히 도쿄대 좌파 교수들과의 체험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시 물었다.

김춘수:한국 고학생들을 따라서 호기심에 갔지요. 나는 집에서 학비가 충분히 왔었기 때문에 일을 하러 갈 필요는 없었는데. 그 친구들 따라서 가와사키라는 부두에서 하역을 했습니다. 일하다가 휴식시간에 한국 고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때 천황도 비방하고 총독정치를 비판을 하고 그랬지요. 우리끼리니까 우리말로 그렇게 한 거지요. 그런데 거기에 한국 스파이가 있었던 거라. 한국 사람인데 헌병대에 헌병보로 있으면서 한국 사람들을 감찰하는 스파이가 염탐하다 고발한 거지요. (역사관에 영향을 준 사건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짐)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니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지요. 그게 뭐냐하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불신이 생겼습니다. 철학이나 사상에 대한 불신이 생겼지요. 그 혐의로 붙들려가서 한 1년 정도 고생했는데, 학교도 퇴학당하고. 당시 같은 교도소에 인민전선파인 제국대학 교수가 있었습니다. 제국대학 교수라면 가장 영향력있는 교수들이었지요. 인민전선파인 좌파 경제학자 교수 중의 하나가 고등계에 붙들려 왔습니다. 하루는 그 교수와 함께 취조를 받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교수를 취조하는 형사는 안보이고 내 담당 형사만 있었어요. 조금 있으니까 교수집에서 사식이 들어오데요. 김이 모락모락나는 갓 구은 빵이 들어왔지요. 그때는 모두 배급시대고 어려운 시대인데 특권계급 아니면 먹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런 사람이 저런 빵을 먹고 있나도 좀 이상했고. 조금 있으니까 나를 취조하던 형사도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그 교수와 나와 둘만 남게 되었지요. 그때 나는 몇 개월 동안 너무 굶어서 피골이 상접했지요. 먹을 거 있으면 눈에 불이 켜지고 목구멍에서 손이 나오는 것 같았지요. 그런데 나는 자연히 그것을 나누어 줄줄 알았는데… 민중을 생각하는 지식인인데, 식민지 어린 학생이 있으면 자네도 하나 먹어라 응당 그럴 줄 알았는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상하고 인격하고는 다른 것이구나. 사상은 믿을 게 못되는 구나. 내가 오히려 부끄러웠습니다.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봤구나. 저런 사람을 존경해야 하는 것인데…

이 사건은 선생의 역사의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질곡의 역사인 한국 정치현실과 일정 부분 거리를 두면서 예술지상주의의 문학관을 가지게 된 점과 실제 창작에 있어서도 깊은 내면 세계를 탐색하는 점은 이 사실과 연관이 있다.

선생은 이 후에도 5공 정권 때 전국구 의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 또한 선생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선생은 당신이 정계생활을 한 것에 대해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고 하셨다. 타의에 의해 시작한 4년 여의 정계생활이 시인으로서의 자신에게는 상처였으며 문학적으로 여간한 손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한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며 이제 말할 때도 되었는데 자전소설을 쓰게 되면 그때 자세하게 말할 생각이라고 하셨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유경 선생이 쓴 인터뷰집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이유경, <시인의 시인 탐험>, 월간조선사, 2002) 선생은 자신의 정계생황을 “처량한 몰골로 외톨이가 되어 앉은 것도 아니고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쩔 줄 모르고 보낸”것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선생님께 역사라는 것은 능동적인 참여가 아니고 어떻게 보면 피해자라는 생각이 강하신 것 같다는 말로 질문을 시작하면서 선생님에게 역사란 어떤 의미입니까, 라는 질문을 드렸다. 선생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김춘수:어떻게 보면 피해자가 아니고 실제로 큰 피해자이지요. 저는 한국의 역사라는 것 뿐만아니라 역사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나는 스스로 역사 허무주의자이다, 라는 말을 씁니다. 역사, 이데올로기, 폭력은 삼각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데올로기는 결국 폭력입니다. 모든 역사가 그렇게 되었지요. 그 삼각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역사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인식이 생겼습니다. 역사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이데올로기가 있고 폭력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역사를 아주 회의적으로 본 것이지요.

갑자기 학생 때 읽은 책이 하나 생각납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베르자예프의 책이지요. 그는 러시아 혁명 때 볼셰비키에 동조를 했지요. 그러다 불란서로 망명을 해서 쓴 책이 있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의 인간의 운명>이라고. 거기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역사가 인간을 심판했지만, 이제부터는 인간이 역사를 심판해야 한다.” 나는 그 말에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말이 옳다고 봅니다. 역사라는 이름 때문에 개인이 얼마나 짓밟혔나요. 역사, 이러면 악 소리도 못하고 꼼짝 못하게 됩니다. 역사에 저항하면 죄인이 되니까요. 이때의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지요.

역사의 歷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것은 과거 일이지요. 史는 기록입니다. 기록하는 사람도 史에 속하고요. 역사는 사실로서 있었던 것을 기록하는 것이지요. 사실은 객관적인 것이고 기록하는 것은 사람이지요. 사람이 기록한다는 것은 주관적이지요. 그런데 기록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사실이 달라지지요. 그러니까 역사는 모순 개념입니다. 그러니 쉽게 말하면 역사는 없다, 이겁니다. 학교 교과서에나 있는 거지요. 어떤 사실의 단편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역사라고 하는 것은 강자의 역사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가 바뀝니다. 역사는 없고 강자, 힘센 사람이 그려 놓은 사실만 있을 뿐입니다.

의문 하나

한국전쟁 중 선생은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들의 모임인 <후반기> 동인에는 가담하지 않고 구상, 이정호, 김윤성 등과 함께 <시와시론>이라는 동인을 결성했다. 문학적 성격으로 본다면 선생은 <후반기> 모임에 있어야 한다. <시와시론>은 문학적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되는데 <후반기>와는 어떤 관계였을까 궁금해졌다.

김춘수:후반기 동인 중에 조향은 나하고 해방 직후, 그러니까 1946년에 김수돈 시인과 함께 <로만파>라고 하는 동인지를 냈습니다. 김수돈 시인은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로 나온 시인이지요. 이 둘 다 마산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처가가 마산이라 자주 드나 들면서 동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 50년 전쟁 때 부산 임시수도에서 조향하고 내가 만났지요. 그때 조향은 부산 동아대의 교수로 있었을 때고요. 조향이 <후반기> 동인을 같이 하자고 권유를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조금 망설였습니다. 조향은 알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좀 불편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생각해 보지요, 하고 살짝 빠져나갔습니다.

그 이후에 진주에서 설창수 시인이 하는 <개천예술제>에 청마 유치환 선생과 함께 갔습니다. 그때 김윤성, 구상 시인 등과 어울리게 되었지요. 그때 우연히 말이 나와서 <시와시론>이라고 하는 걸 내게 되었지요. 그때 문학적인 경향이나 뜻이 같아서 한 것은 아니고, 한번 낸 것이지요. 1권 나오고 말았습니다.

김수영과 김춘수

선생은 김수영과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다. 김수영이 죽기 얼마 전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종로의 한 여관에서 김수영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밤에 심심하여서 수첩을 뒤적이다가 전화번호가 나와서 걸어본 것이다. 김수영이 집에 있긴 했지만 술이 만취해서 도저히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통화도 못하고 다음 날 선생은 볼 일을 마치고 곧바로 내려가게 된다.

60년대 김수영이 참여의 길을 가게 되고 김춘수는 <타령조> 연작을 쓰면서 의식적인 트레이닝의 시작(詩作)을 하고 있었다. 이미지와 관념 사이,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에서 끊임없는 사생과 추상을 거쳐 <처용단장> 연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의 순수와 참여의 대립 구도에서 선생은 젊은 모더니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순수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김수영은 참여 진영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좀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김춘수와 김수영을 이런 거친 분류 속에 넣는 것은 무리이다. 그럼에도 당시 김수영이 참여로 갔기 때문에 그 반대 진영 쪽이라 할 수 있는 내면세계로 더 침잠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춘수:그 말이 옳기는 옳은 말입니다. 저는 아까 말했다시피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상과 역사라는 것에 대한 회의가 생겼습니다. 지금도 이 역사허무주의자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부딪히면 현실에 대한 울분 같은 것도 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같은 시도 썼지만 내 본래 의식은 역사허무주의였습니다. 역사나 현실의 문제에 대해 등을 돌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때 김수영의 <풀> 같은 작품을 보면서 내가 써보고 싶었던 것을 벌써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종의 라이벌 의식, 질투가 생긴 거지요. 나보다 선수를 쳤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의식적으로 더 내면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 때 김수영을 가장 큰 라이벌로 생각하셨나요?)

김춘수:했지. 내가 그때 뿐만 아니라 내 생애에 시인으로서 라이벌 의식을 가진 시인은 그 사람뿐입니다. 미당 같은 시인도 있었지만, 나와는 시적 세계관이 너무 다르니까 그런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었지요.

의미에서 무의미, 다시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의미로

김춘수 선생은 40년대 후반 <로만파>라는 동인지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니까 통상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게 되는 신춘문예나 잡지의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선생의 술회에 따르면 40년대 후반 4~5년은 아류의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즉 선배 시인들의 시를 모범으로 트레이닝을 하던 시절이었다.

50년대에 들어서 선생은 자신의 시에 대한 자성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자성의 시가 바로 릴케와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받은 꽃을 소재로 한 일련의 연작시이다. 소위 관념시라 부르는 김춘수의 시는 스스로 ‘플라토닉 포에트리’라고 부르고 있다.

6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시적 실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김춘수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무의미시’이다. 대상과의 거리가 상실된다는 것. 대상을 지울 때에 대상의 구속으로부터 시인은 해방되고, 어떤 의미부여의 행위로부터도 해방된다. 그러나 무의미시가 가지고 있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에서 이미지는 의도하지 않아도 의미를 띄게 된다. 이 의미를 지우기 위해 탈이미지로 가게 된다. 탈이미지는 리듬만으로 시를 쓴다는 것인데 이것은 시인이 고백한대로 언어도단의 세계이다. 이러한 무의미시의 변화 양상을 이승훈 선생은 <부두에서>, <봄바다>, <인동 잎>에서 보이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 <처용단장> 2부에서 드러나는 탈이미지의 세계, 즉 무의식의 세계로 전환되는, 이미지조차 마침내 소멸되는 시기, 그리고 이러한 되풀이로 인해 오로지 리듬만 남게 되는 시기(<이중섭>, <예수>, <중국 유적지> 연작)로 나누기도 한다.

무의미시의 막다른 골목에서 시인은 다시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시 의미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이 의미의 세계는 이전의 관념시와는 다른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세계이다. 이 관념시와 무의미시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형성된 시집들이 <들림, 도스토예프스키>, <거울 속의 천사>, <쉰 한 편의 비가> 등이다. 이런 시편들이 나에게 된 내면 정황을 선생은 전집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선적 세계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상 시는 더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나의 무의미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또 의미의 세계로 발을 되돌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무의미시 이전의 세계로 후퇴할 수는 없다.

무의미시로 대표되는 선생의 작품세계에서 실제로 일반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시는 무의미의 시편들이 아니다. 오히려 의미의 시, 그러니까 초기 관념시와 후기에 다시 의미로 되돌아온 시기이다. 아무래도 무의미시가 일반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선생에게 독자는 어떤 의미인가. 선생은 “내 시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소수의 독자들을 염두해 두면서 쓴다”고 했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선생의 무의미시도 하나의 과정인지 모른다. 무의미시는 어느 한 소실점으로 모일 수 있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출구 같은 게 아닐까.

선생은 젊은 후학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까. 그간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이번에는 모더니즘 계열의 젊은 시인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렸다. 큰 틀을 놓고 봤을 때 선생의 시세계를 이끌어갈 만한 시인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선생은 후학들이라면 어떤 연배를 두고 말해야 하는지 잠시 고심하셨다. 30, 40십대 젊은 후학들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천천히 말을 이으셨다.

김춘수:그동안 젊은 후학들이 우리 나이 때보다는 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학에서 어학력도 갖추고 일본을 통하지 않고도 원서를 읽을 수 있고 외국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정보력이 있기 때문에 시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습니다.

그런데 우선 내가 봐도 이해 안 되는 시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박상순, 송찬호 같은 시들입니다. 이들의 시는 과격 모더니즘에 속하죠. 전위성이 있는… 그런데 이 사람들의 전위는 이승훈이나 황지우의 전위와는 또 다릅니다. 이승훈은 존재론적이고 황지우는 사회성을 띄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상순이나 송찬호는 전혀 그런 게 없습니다. 이미지가 그려내는 환상세계만 있을 뿐입니다. 허무의 입장에서 본다면 앞의 두 사람에 비해 훨씬 허무적입니다. 의식상태가 그런 거 같습니다. 믿고 기대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거지요. 철저한 비대상 세계, 말하고 싶은 대상이 없는 거지요. 환상세계가 이미지를 통해서만 펼쳐지고 있는데, 아무 의미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허무를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요. 허무는 견뎌내기 어렵습니다. 뭔가 기대는 게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육체를 가진 이상, 허무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허무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자유, 완전히 해방된 상태입니다. 그 자유를 견디지 못합니다. 내가 무의미시를 견디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이런 시만 못씁니다.

의식이라고 하는 건 언어입니다. 언어와 의식은 이콜 아닙니까. 언어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건데 결국 언어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건 시를 못쓴다는 것입니다. 시를 못쓰거나 다른 상식적인 세계와 타협하거나가 되지요. 그러니까 상식적인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찾는 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시사는 굉장히 진일보했습니다. 시 자체를 극한으로까지 끌고 갔으니까요. 그러나 진일보라는 게 어느 한계에 가면 막다른 골목 아닙니까. 우리 시도 막다른 골목에 있습니다. 시가 없어지는 단계에까지 와있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서정을 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서정주의를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입니다. 시에 대한 자의식이 있어야 됩니다. 내 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왜 이런 시를 썼는가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충동적으로 쓰고 마는 것은 아마추어가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게 통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안됩니다. 내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떤 예술가적 자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시는 자연발생적으로 나올 수가 있지만 그걸 의식하고 제어하는 이성이 있어야 합니다. 19세기 시대의 로맨티스트들처럼 자연발생적으로 부르짓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우리 시는 대체로 단순해요. 소품이고, 입체성이 없고 논리도 없고 평면적이지요. 좋은 시들의 시가 대체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볼륨이 있는 시, 논리전개도 입체적이고, 파라독스나 아이러니를 깔아놓은 입체적인 전개 등의 양적으로 무게가 있는 큰 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릴케하고 엘리엇처럼 말이죠. 그런 큰 시인이 나와 주었으면 싶다는 생각입니다.

선생은 1시간 30여분 이상 이어진 인터뷰 시간 동안 뜨거운 열정으로 세심하게 하나씩 짚어주시며 말씀하셨다. 선생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든 시간들이 문학적 열정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에게 문학 이외의 것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선생에게는 사회적 지위도 국가적 명예도 귀찮고 빨리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을 뿐이다. 선생은 지금도 공부하고 계신다.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반성과 회의야말로 오래도록 문학을 지속하는 힘이 아닌가.

선생은 당신이 앞으로 어떤 세계로 또 나아갈 지는 당신 자신도 모른다고 하셨다. 선생은 시 <강설降雪>에서 “오지 않는 것이 오는 거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인간은 늘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시를 쓰게 하는 건 아닐까. 이 비껴 서지 않는 역사 앞에서 선생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참 오랜만에 멀리 통영의 생가에 눈 내리고 있는 모습을 보지만, 의식은 먼 끝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일까. 시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바로 그것일까.

강설降雪

역사는 비껴 서지 않는다.

절대로, 그러나

눈이 저만치 찢어지고 턱이 두툼한

(그 왜 있잖나?)

그는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이 오는 거다.

그는,

기다림이 겨울에도 망개알을 익게 하고

익은 망개알을 땅에 떨어뜨린다.

또 한 번 일러주랴.

역사는 비껴서지 않는다.

절대로, 땅에 떨어진

망개알을 겨울에도 썩게 한다.

썩게 하여 엄마가 아기를 낳듯 그렇게

땅을 우비고 땅을 우비게 한다.

그는 온다고 지금도 오고 있다고,

오지 않는 것이 오고 있는 거라고,

바라보면 멀리 통영

내 생가가 눈을 맞고 있다. 내 눈에

참 오랜만에 보인다.

기왓장 우는 소리.


_ <현대시>, 2004년 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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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이재훈






이재훈:오랫동안 병 중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양평 서후리에서 창작과 요양을 하고 계신데요. 건강은 어떠신지요? 근황을 여쭙고 싶습니다.


오규원:내 지병은 폐기종이라는 만성질환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숨 쉬는 기능이 약해지는 병입니다. 무엇보다도 맑은 공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서후리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모든 만성질환이 그렇겠지만 리듬을 깨뜨리지 않고 적절하게 조절을 하며 지냅니다. 여러 가지 제약을 많이 받기 때문에 집 밖 외출을 하기는 힘들고 공기가 따뜻한 시간에 집의 뜰을 산책합니다. 여느 건강한 사람들처럼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지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작품을 쓰려고 노력합니다(그러나 모두 잘 아시겠지만 작품을 쓸 때는 그 선을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유년 시절은 삼랑진이라는 산골, 어머니의 죽음, 기숙과 기식의 학창시절로 요약됩니다. 이러한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다른 산문들을 통해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의 유년 또한 그 세대들의 삶이 그러하듯 평탄치는 않았습니다. 시인들은 대개 평탄치 않은 삶을 담보로 삶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충만한 감정으로 풀어나가기 마련입니다. 선생님의 작품 속에서는 문학 감수성의 모태라 할 수 있는 고향 내지 유년이 어떠한 방식으로 투영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오규원:초등학교 6학년을 경계로 나의 유년은 대조적으로 그 양상을 전개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 전까지는 정미소, 복숭아 과수원, 꽤 많은 농토를 가진 집의 막내아들로서 결핍을 모르고 지낸 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6학년 이후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가세의 몰락, 기숙과 기식이라는 연속적인 결핍과 불행이 발생하는 시기입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많이 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내 삶과 의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어머니의 죽음이 가로놓인 초등학교 6학년 전과 후는 어머니의 자궁 안의 세계와 자궁 밖의 세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부재는 고향을 관념화시키는 쪽으로 내 의식을 몰고 가게 되었습니다. 즉 어머니의 부재는 현실적으로 엄연히 고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으로, 회복될 수 없는 존재로 느껴지게 하는 요인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내내 그런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향을 생각하면 지극히 평화로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고향에서는 바람이 안 붑니다. 어머니와 함께 고향이 관념화되어 있어서, 현실적인 고향은 내 고향이 아니라고 부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는 외지 생활과 연결되어 있고, 기숙과 기식의 시절이 됩니다. 삼랑진을 떠나 부산으로 유학을 간 것이지만, 내게는 이 시기가 끊임없는 긴장과 자괴감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었습니다. 내가 현실을 늘 의식하고 있는 것은 그때부터 내면화된 습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기숙과 기식은 자기 현실을 낯설게 보게 하고 끊임없는 결핍을 느끼게 했습니다. 남이 아닌 형이나 누이나 숙부의 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이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이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체질적으로 예민한 데서 연유하는지 또는 삶의 급격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면서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었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부재=내 집의 상실=고향의 상실은 지금까지도 내가 사는 현실에 대해 내 스스로 집이 없는 자의 의식을 갖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내 삶이 기숙과 기식의 시간 안에 있다는 인식은 우리 사회도 기숙과 기식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의식을 갖게 합니다. 결국 이러한 의식들이 나를 리얼리스트로 만들고, 주체중심의 의식이 아닌 반(反)주체 중심의 의식을 갖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재훈:선생님께서는 4.19세대로 일컬어지는 문지 계열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 계열에서도 언어와 자아의 문제에 대해 가장 예민하고 독창적인 작품과 그에 따른 문학론을 펼쳐왔습니다. 문학사의 측면에서 볼 때 선생님의 작품 세계가 이전 세대인 50년대, 더 거슬러 30년대 모더니스트들과의 변별성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규원:30년대나 50년대 모더니스트 시인들은 몸과 머리의 토대가 다릅니다. 풀어서 얘기한다면 몸은 농경사회에 토대를 두고 태어났고 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머리는 서구 산업사회가 토대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몸과 머리의 간격이 그 시대의 모더니스트 시인들을 난감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 시인들의 시가 실패했다면 그런 시대나 사회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60년대까지 농경사회였다는 것을 한 눈에 보여주는 예는 박정희 정권이 그때까지도 새마을 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30년대는 이상이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예인데, 이상은 우리 시대나 사회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몸과 머리가 일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 우리 사회를 노래했다면 농경 사회와 산업 사회의 간격이 생겨 시가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나의 삶’에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모더니스트의 현실인 몸과 모더니스트의 언어인 머리가 현실의 괴리를 일으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다행스럽게도 한국에 모더니티가 발생한 70년대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선배들처럼 수입이론이 아닌 자생이론을 가질 수 있는 모더니스트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재훈:동시대의 시인들과의 변별성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이승훈 선생이 가장 적확한 대상일 듯 싶은데요. 동시대의 시인이면서 또한 동류의 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평가 면에서는 각각 독립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듯합니다. 동시대 시인들과의 변별점과 그 연관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오규원:잘 알려진 대로 이승훈 시인은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론을 자기 나름대로 새롭게 개척해서 80년대부터 ‘비대상시론’을 발표했습니다.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서 시론을 끊임없이 내놓고 있는 시인입니다. 나는 관념의 재해석, 관념의 해체에 이어 현재 관념을 배제한 ‘날이미지시’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해도 두 사람 사이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면 김준오 선생의 글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김준오 선생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한국 모더니즘 시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 분입니다. 선생은 모더니즘시론은 조향․김춘수․이승훈의 계열과 김기림․김수영․오규원의 계열로 이원화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이 분류를 참고하면 두 사람 사이의 변별성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재훈:많은 평자들이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젊은 시인들을 선생님의 영향관계 하에 평가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이는 선생님의 작품과 시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후학들의 창작과정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데요. 자아와 내면의 문제에 탐구, 사회성을 띄고 있다는 점, 형태적인 실험 등등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그 영향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 또한 선생님의 이전 세대에서도 행해진 것이었는데요.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는 후배 시인들의 문제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오규원:내가 예로 잘 드는 집이라는 건축물을 가지고 얘기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구조와 공법을 가지고 건축한 우수한 집 한 채가 있다고 칩시다. A라는 사람은 그 집의 거실과 주방을 본 떠서 자기 집의 거실과 주방을 개조했습니다. 또 B는 그 집의 지하 서재를 모델로 해서 자기 집의 서재를 개조했고 C는 그 집의 다락방을 보고 자기 집의 새로운 다락방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했을 경우에 현실적으로 A B C 세 사람의 집은 좋아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A의 집을 보고 이 집은 거실과 주방 때문에 이 집 전체 구조가 좋아졌다, B 집을 보고는 집의 내부구조가 몰라보게 좋아졌다, C 집은 이 집에 새로운 날개를 하나 더 단 것 같다는 칭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X 라는 사람은 이 집의 구조와 건축 공법을 연구하고 그 기초의 정신을 이해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건축물을 만들었습니다. 시의 관계도 위와 같이 A B C와 X의 두 종류의 영향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건축 미학적으로 볼 때 X의 건축물은 독자적으로 평가를 받지만 A B C는 건축학적으로는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모방 건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영향을 받을 바에는 X와 같이 받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A B C는 현실적으로는 다소 이점이 있을지 모르나 근본적으로는 그 시의 세계가 발전적으로 될 가능성을 없을 것입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시론은 김춘수, 이승훈과 더불어 우리 시사에서 독창적인 시적 방법론으로 평가됩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와 이승훈의 비대상시, 선생님의 날이미지의 시는 각각 고유한 방법론을 내재해 있는 독특한 시론으로 비견됩니다. 하지만 많은 부분 김춘수, 이승훈, 오규원 선생의 시론을 읽고 알고 있지만 일반 독자들뿐만 아니라 시인들까지도 각 시론의 차이와 특성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는 경우를 봅니다. 얼마 전 제가 김춘수 선생을 인터뷰하면서 느낀 게 있었는데요. 시인의 시론을 당사자의 육성을 통해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소중할 듯 싶습니다. 잘못 이해하거나 해석하는 소지를 줄일 수도 있겠고요. 선생님의 시론과의 차이와 개별적 특성은 무엇인지 간략히 말씀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오규원: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와 내 날이미지시를 비교해보겠습니다. 아니 변별점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무의미시는 ‘무의미를 지향’하고 날이미지시는 ‘의미를 지향’하는 시입니다. 시의 차원에서는 가치가 있고 통상적인 의미에서는 대상도 주제도 의미도 없는, 그런 개념을 가진 것이 무의미시론 입니다. 이 개념을 좀더 명확하게 해 보자면 김종삼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매우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북치는 소년」에 보면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이라는 시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을 ‘내용 없는=무의미’ ‘아름다움=시’로 대체해보면 무의미시가 어떤 시인지 그 윤곽이 드러납니다. 시의 내용이 무의미하니까 시인은 시의 형태에서 그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그래서 무의미시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처용단장」을 보면 서술시, 주술시, 해체시, 그리고 접붙이기시라는 형태들이 실험되고 있습니다. 날이미지시는 사변화되거나 개념화되기 이전의 의미, 즉 관념화되기 이전의 의미를 존재의 현상에서 찾아내어 이미지화하는 시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시의 의미는 관념을 배제한 날 것 상태, 관념화되기 이전의 의미입니다. 그런 시의 내용, 즉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특성 때문에 날이미지시에서는 이미지의 성격 변화가 무의미시의 형태적 변화처럼 중요하게 됩니다. ‘사실적 날이미지’ ‘발견적 날이미지’ ‘직관적 날이미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날이미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설명한 바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간략하게 설명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보다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내 작품을 보기로 들겠습니다.


그때 나는 강변의 간이주점 근처에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점 근처에는 사람들이 각각 있었다

두 손으로 가방을 움켜쥔 여학생이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지는 해를 손을 잡고 보고 있었다

주점의 뒷문으로도 지는 해가 보였다

한 사내가 지는 해를 보다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다

가방을 고쳐 쥐며 여학생이 몸을 한 번 비틀었다

젊은 남녀가 잠깐 서로 쳐다보며 아득하게 웃었다

나는 옷 밖으로 쑥 나와 있는 내 목덜미를 만졌다

한 사내가 좌측에서 주춤주춤 시야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 「지는 해」


이 작품은 보는 바와 같이 ‘사실적 날이미지’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강변의 간이주점 근처”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만 나타나 있습니다. 10행의 ‘아득하게’라는 표현이 정서가 개입된 유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 표현 또한 웃는 모습이라는 사실성을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처럼 사실성 그 자체만으로 날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사실적 날이미지입니다.


담쟁이덩굴이 가벼운 공기에 업혀 허공에서

허공으로 이동하고 있다


새가 푸른 하늘에 눌려 납짝하게 날고 있다


들찔레가 길 밖에서 하얀 꽃을 버리며

빈 자리를 만들고


사방이 몸을 비워놓은 마른 길에

하늘이 내려와 누런 돌멩이 위에 얹힌다


길 한켠 모래가 바위를 들어올려

자기 몸 위에 놓아두고 있다

― 「하늘과 돌멩이」


이 작품은 ‘발견적 날이미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실적 날이미지’로 되어 있는 「지는 해」와는 다르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느낄 것입니다. ‘발견적 날이미지’로 되어 있는 날이미지시는 사실성 위에 새롭게 발견된 다른 의미가 부과되어야 합니다. 이 작품을 사실적 날이미지로 쓴다면 “담쟁이 덩굴이 뻗어 있다/하늘에서 새가 날고 있다/들찔레 꽃이 졌다/돌멩이 위로 하늘이 있다/길에 바위가 놓여 있다”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 사실적 날이미지가 발견적 날이미지로 바뀌는 것은 그 뜻 그대로 발견적 시선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들찔레가 길 밖에서 하얀 꽃을 버리며/빈 자리를 만들고”라는 현상을 그 예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이 현상의 사실적 표현은 “들찔레 꽃이 졌다”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인 내가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들찔레의 시선으로 본다면 꽃을 떨어뜨리는 순간은 자신의 일부를 버리는 시간인 동시에 또한 자신의 일부로서의 빈 자리를 만드는 시간인 것입니다. 존재가 사라지면 빈 자리가 생긴다는 인식과 사라지면서 존재는 빈 자리를 만든다는 인식의 차이를 생각해보십시오. 주체 중심의 시선이 아닌 반주체 중심의 시선이 발견적 이미지를 가능하게 합니다. 발견적 날이미지는 관념적으로나 비유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려져 있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낯설지만 분명 사실적이고 객관적입니다.


어제는 펑펑 흰 눈이 내려 눈부셨고

오늘은 여전히 하얗게 쌓여 있어 눈부시다

뜰에서는 박새 한 마리가

자기가 찍은 발자국의 깊이를

보고 있다

깊이를 보고 있는 박새가

깊이보다 먼저 눈부시다

― 「발자국과 깊이」


이 작품은 「하늘과 돌멩이」와는 또 다릅니다. 이 작품과 같은 ‘직관적 날이미지’는 그 이미지가 깨달음을 동반한 상태에서 사실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발견적 날이미지와 변별되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하늘과 돌멩이」에서 “모래가 바위를 들어올려/자기 몸 위에 놓아두고 있다”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바위는 분명 모래 위에 놓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발자국과 깊이」에서의 “깊이”라는 표현은 어떤 깨달음을 동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즉 박새가 쳐다보는 것은 발자국이 아니라 발자국의 깊이입니다. 발자국을 쳐다보는 것은 사실적이지만, 발자국의 깊이까지를 보는 것은 깨달음으로 보는 시선이므로 직관적 날이미지가 됩니다. 이렇듯 직관적 날이미지가 깨달음을 동반하는 데도 관념적이지 않게 되는 것은, 그 깨달음 또한 분명 사실성 위에서 직조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잠깐, 재미있는(?) 차이점 한 가지를 말해 볼까요. 김춘수 시인은 ‘허무’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는 ‘허무’를 한번도 언급한 바 없습니다. 그것도 무의미 지향과 의미 지향과 관계있지 않을까요? 나는 위와 같은 차이 때문에 형태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김춘수 시인은 ‘예술적 인식’의 차원에서, 이미지의 내용을 추구하는 나는 ‘인식적 예술’의 차원에서 시의 구조를 짜고 있다는 구분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둘째, 무의미시는 ‘서술적 언어 체계’속에서 이루어지고 날이미지시는 ‘환유적 언어 체계’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김춘수 시인은 이미지를 의미가 발생하는 않는 서술적 이미지와 의미가 발생하는 비유적 이미지로 나누고, 무의미시를 서술적 이미지에서 구합니다. 나는 언어학에서 인접성에 근거하는 환유적 체계와 유사성에 근거하는 은유적 체계를 차용하고, 환유적 언어 체계 속에서 날이미지시를 구합니다. 그러나 서술적 이미지에서도 의미는 발생하며 환유적 언어 속에서도 은유가 발생하므로 무의미시와 날이미지시는 각각 나름의 조심스러운 수사적 장치와 행보를 해야 합니다.

셋째, 무의미시는 ‘주체 중심의 심리적 세계’이며, 날이미지시는 ‘반주체 중심의 사실적 세계’입니다. 무의미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통상적으로 대상도 없고 주제도 없는 시입니다. 주제나 대상도 없으면 당연히 그 세계가 심리적일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또한 관념적인 일면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연유로 무의미시는 시의 행간 어딘가에 관념을 숨겨놓고 있습니다. 아이디얼리스트가 어떻게 관념을 배제하겠습니까. 외견상 관념의 배제로 드러나는 이 무의미시와 날이미지시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이곳, 관념의 배제라는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날이미지시도 관념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체 중심의 심리적 세계인 무의미시는 그 특성상 관념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투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날이미지시는 존재의 현상을 반주체중심의 시선으로 이미지화하기 때문에 관념이 은폐되지 않고 배제되어 투명합니다.  


활자 사이를

코끼리가 한 마리 가고 있다.

잠시 길을 잃을 뻔하다가

봄날의 먼 앵두밭을 지나

코끼리는 활자 사이를 여전히

가고 있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코끼리,

코끼리는 발바닥도 반짝이는

은회색이다.

― 「은종이」


김춘수 시인의 이 작품을 보면 그 차이를 좀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외견상 객관적 묘사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사실은 심리적 주관적 묘사의 세계입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은종이 한 장 끼어 있었다”는 한 줄의 부제가 유일한 연상의 통로인 이 작품은 ‘코끼리가 가고 있는 것은 활자 사이이고, 그 코끼리는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고, 그러나 잘 보이지도 않는 코끼리의 발바닥은 반짝이는 은회색’이라는 모순된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모순은 대소(大小) 관념의 조작이라는 숨겨진 의식의 놀이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 이 결과 발생한 난센스(무의미)는 서정적인 다른 시행과 결합하여 시가 되고, 시인의 관념은 작품 뒤에 숨게 됩니다.

심리적 주관적 묘사의 세계인 무의미시와는 달리 날이미지시는 관념화되기 이전의 의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존재의 현상을 날 것 그대로, 객관적으로 묘사합니다. 그 세계는 심리적 세계가 아닌 사실적 세계이며, 주체 중심의 시인 무의미시와는 달리 반주체 중심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나비가 동에서 서로 가고 있다

돌이건 꽃이건 집이건

하늘이건 나비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모두 몸이 둘로 갈라진다 갈라졌다가

갈라진 곳을 숨기고 다시

하나가 된다

그러나 공기의 속이 굳었는지

혼자 길을 뚫고 가는 나비의 몸이

울퉁불퉁하게 심하게 요동친다

― 「봄과 길」


이 작품은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가는 짧은 순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사실적 풍경이 낯설게 보이는 것은 발견적 이미지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나비와 만나는 때는 모든 존재의 몸이 둘로 갈라지는 순간이며, 나비는 날아가는 모습이 불균형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넷째, 김춘수 시인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서구 문화의 이원론에 발을 붙이고 있고 나는 경(經) 중심의 관념 불교가 아닌 실천 중심의 선불교의 일원론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 경우는 김춘수 시인과는 달리 종교가 직접적으로 작품에 개입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재훈:최근 몇 년 사이의 선생님의 시가 호흡이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되기도 합니다. 한쪽에서는 건강 때문에 그러하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날이미지의 시가 근본적으로 시를 짧게 요구하는 일면이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오규원:날이미지가 시의 길이를 짧게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해야겠습니다. 날이미지의 특성이 행갈이와 연갈이의 호흡을 바꾸고 시의 길이에도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시의 구조가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10년쯤 전부터 짧은 시에 관해서 따로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건강 때문에 시가 짧아진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짧은 형식의 시를 탐구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여러 가지 책들을 다시 찾아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내 체질에 맞는 어떤 형식의 짧은 시가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근년에 발표되는 나의 짧은 시는 그러한 관심의 일환입니다. 그러므로 내 시에서 보편적인, 그리고 종래부터 가지고 있던 내 호흡의 길이의 형태를 띠고 있는 시와 근래의 내 짧은 시를 따로 나누어 읽어야 합니다.


이재훈:시인은 시로 얘기할 뿐이다. 내 시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시인들도 많습니다. 대개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시인이 가고자하는 세계를 읽을 수 있는 시겠지요. 시인의 시론이 시를 쓰는데 얼마만큼의 필요충분조건이 될까요.


오규원:독자적이고 독창적인 구조와 공법을 가진 건축물이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설계도와 공사 지침서가 있을 것입니다.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기이한 일일 것입니다. 시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구조와 수사법을 가진 작품이 있다면 이를 뒷받침하는 시론이 있을 것입니다. 없다면 그 또한 기인한 일일 것입니다. 단 시론이 존재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명문화(明文化)되어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시인의 머리 속에만 있고 명문화되어 있지 않은 경우입니다. 그 어느 쪽이든 있기만 하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시론이라고 해서 꼭 논문 형식으로 되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떤 형식이든 상관없습니다.


이재훈:얼마 전 한 시전문지에서 “우리 시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연속기획을 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다른 여러 잡지에서도 시의 문제점에 대해 논구하는 많이 특집들이 있었습니다. 특집들을 토대로 살펴볼 때 우리 시의 문제점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실험의식의 부재와 복고적 서정성으로의 퇴행이고 또 하나는 소통불능의 자폐적 내면으로의 갇힘입니다. 앞의 문제는 소위 일컫는 서정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고 뒤의 문제는 모던한 시에서 발생되는 문제점입니다.

시인들 스스로는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새로운 유토피아나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복고’와 ‘유폐’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첫 시집이나 두 번째 시집을 낸 이후로 지쳐서 시작을 포기할까도 생각하는 시인들도 많이 눈에 띕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오규원:우리 시의 문제가 서정시의 ‘복고’와 모던한 시의 ‘유폐’로 정리되고, 전망의 부재가 ‘복고’와 ‘유폐’를 선택하게 한다고 젊은 시인들이 스스로 인정하는 한, 한국시의 미래는 밝다고 봅니다. 젊은 시인들이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한 그들에게 전망 있는 시학이 개척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망 있는 시학이 반드시 ‘복고’와 ‘유폐’를 벗어난 곳에서만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철저하고 절실한 ‘복고’와 처절하고 막다른 ‘유폐’의 시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는 그 어디에서든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새로 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서정시의 ‘복고’니 모던한 시의 ‘유폐’니 하는 시적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뿐 아니라 감각조차 할 수 없는 다수의 시인들에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위의 지적은 수정되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생산한 문학은 한국 사회가 그대로 땅 속에 묻어버릴 것이므로 문제가 될 것도 없겠습니다. 얼마간의 종이 낭비가 따르겠지만 그런 정도의 낭비란 문화가 언제나 감당해야 할 몫인 탓입니다.


이재훈:시를 쓰는 젊은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요.


오규원:예술이란 중도라든지 타협이라든지 모범이라든지 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극단에 있습니다. 이 점에 유의해 주었으면 합니다. 대중도 없고 환호도 없고 독자도 없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곳에 자리 잡으면 당신의 독자가 새로 창조될 것입니다.



* [시와세계], 2004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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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하 이재훈





허만하 시인이 1999년 30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들고 문단에 다시 얼굴을 비췄을 때 한국 시단은 모두 놀랐다. ‘어설픈 사고와 감상과 대중적 푸닥거리와 쉬운 위안이 유행하는 시대에 있어서 이만큼 깊이 생각하고 끈질기게 생각하는 시인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김우창), ‘지난 천년의 막바지에 마치 스톤헤지의 유적처럼 발굴되었다’(정과리)는 평을 받았다. 한때 “시의 순결이 사라지고 있는 이 무잡한 시대에 시집 없는 시인으로 남는 것이 아름다운 선택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시인 허만하. 시인은 이제 한국 시단에서 가장 활발히 시와 비평을 생산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다.
허만하 시인과는 몇 번의 소중한 인연이 있다. 부산에서의 만남과 이산문학상 수상시 대표시 낭송을 했던 일이다. 그중 2001년 부산에 서규정 시인을 인터뷰하러 내려갔을 때의 뵈었던 일은 더욱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부산에 살고 있던 손택수 시인과 함께 찾아 뵈었다. 늘 뵈었던 광한리 파크호텔.(그 이후로도 김참, 김언 등의 시인과 몇 번 더 찾아뵈었는데 늘 파크호텔에서 뵈었다. 김참 시인은 허만하 선생의 호를 파크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우스개소리도 했었다.) 시인과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쉽다며 내일 다시 만나자고 했다. 다음날 파크호텔로 다시 찾아뵈었을 때, 시인은 택시를 한 대 대절하여 타라고 손짓을 했다. 택시를 타고 우리는 푸르디 푸른 쪽빛 바다를 보기 위해 기장군 철마라는 동네로 찾아 들어갔다. 그때 먹었던 국수와 온통 바다만 보였던 카페, 그리고 큰 품으로 끝없이 시에 대한 애정을 보내주시던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이재훈:선생님과 정담을 나누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선 건강은 어떠신지요?

 

허만하:책을 읽고 글쓰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재훈:2001년 부산에서 선생님을 뵈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참 감사한 일이고 오래도록 제 기억에 깊이 남습니다. 그때 부산 근처 철마란 곳에서 바다가 바라보이는 카페에 갔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직접 구경시켜주셨지요. 그곳의 풍광을 보며 감탄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런 풍경들과 조우하면서 시가 탄생되는구나 생각했고요. 요즘도 여행을 많이 다니시나요?

 

허만하:나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생각이 떠오릅니다. 기장의 갈치고개는 부산시내이면서도 아주 조그마하고 소박한 자연이 남아 있는 곳이지요. 나는 그때 이재훈 시인이 내 「지명에 대하여」라는 시에 강원도의 골짝 서화 마을 이름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서 물으면서 아버지 직장관계로 어린 시절을 서화에서 보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지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공연히 반가웠었지요. 나들이는 여전히 제 생활의 한 부분입니다. 그제는 거창을 거쳐 무주를 다녀왔습니다, 계절에 따라 밟는 길을 달리하지요.

 

이재훈:이미 선생님의 작품 세계와 산문을 통한 사유들이 많이 소개된 터라 제가 어떤 질문을 드려야 될지 스스로 부족한 게 많이 느껴집니다. 이런 점에서 빌 모이어스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을 인터뷰한 <신화의 힘>이란 책이 떠오릅니다. 선생님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자괴감 같은 것들이 일었습니다. 치열한 사유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직무유기 같은 것들 말입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생각하겠습니다. 따뜻한 애정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허만하:나도 그 대담을 읽고 캠벨의 생애가 지적인 여행의 연속이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그가 광범위한 문화철학적 언저리를 거느린 뛰어난 신화학자이면서도 대단히 유능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대담 들머리에서 켐벨과 모이어스 사이에 나누어진 수준 높은 대담 이야기를 들으니 공연히 긴장이 됩니다.

 

이재훈:‘만남’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에 중요한 만남 몇 가지가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릴케’와의 만남, ‘실존주의’와의 만남, 그리고 ‘풍경’과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그 밖에 여러 철학자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먼저 ‘릴케’와의 만남이 선생님의 문학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여 김춘수 선생께서도 릴케와의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본 유학시절 고서점에서 릴케를 만났었지요. 선생님께서 만난 릴케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덧붙여 ‘천사’가 아닌 ‘죽음’의 관점으로 파악되는 릴케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허만하:의예과 시절 독일어 교수이면서 의예과 부장이었던 김달호 교수님의 가르침으로 릴케를 처음 알았습니다. 그 무렵, 내가 접했던 둘레의 시들이 사물의 본질에 파고들지 못하고 흔히 서정의 표면을 스치는 감상에 머물고 있는데 절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릴케의 시가 계시처럼 제 발로 다가 왔던 것입니다.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릴케의 시집은 가다야마 도시히고(일)의 <신역 릴케시집>(1942)이라는 일역 시집이었습니다. 그 날자는 Aug.26/52입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이 책의 안표지에 적혀 있는 내 서명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의예과 1학년을 마친 여름방학 때입니다. 열심히 철학서적을 탐독하던 무렵이지요. 그 무렵 우리나라에 온전한 릴케 번역 시집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릴케는 끊임없이 죽음과 대결하면서 자기 정신의 발전을 이룩하고 마지막으로 죽음과의 실존적 만남을 가졌던 시인이라 생각합니다. 릴케는 하이데거에 앞서서 죽음을 내면화하고 인간화하였지요. 젊은 시절의 그의 희곡 「백의의 공작부인」에 나오는 “죽음과 탄생은 날마다 우리 안에 있다”는 데서 시작해서 「말테의 수기」의 무의미한 죽음을 거쳐 「두이노의 비가」에 이르는 긴 과정은 고유한 죽음에 이르는 험난한 도정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제1비가에서부터 죽음의 문제를 둘러싸는 시적 사유를 펼치고 있지요. 제1비가에서 릴케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뚜렷하게 구별하는 것은 “산 자들이 항시 범하는 잘못”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두이노의 비가>는 장대한 죽음의 현상학이라 이름 지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죽음을 주제로 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총체적으로는 전반부에서는 인간존재의 무상성이 다루어져 있고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죽음과 생이 하나가 되는 열린 세계 안에서 인간존재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물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재훈:당시 대구에서 발간된 <시와비평>의 편집동인으로 참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문학예술>로 데뷔하기 전이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시와비평>을 상당히 중요한 동인지로 말씀하신 것을 다른 글을 통해 읽었습니다. 동인지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정체성이 있을 겁니다.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활동하시는 <현대시> 동인이 60년대 문학사에서 가지는 정체성처럼 말입니다. <시와비평>이 3집까지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더라도 한번 참고해봐야 할 텍스트가 아닌가 합니다. 가령, <후반기> 동인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한 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문학사 속에 중요한 동인지로 존재해 있으니까요. 문학사에서 <시와비평> 동인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허만하:<시와비평>은 3집으로 끝났습니다. 이 3집에 나는 스펜더의 「비행장 부근의 풍경」과 맥타가트 교수(미 공보원장직에서 영남대학교 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쓴 시론 한편(오든과 스펜더를 비교한 정치한 평론으로 나의 청탁으로 <시와비평>을 위하여 집필해 주었다)을 번역 게재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나는 이 잡지의 의미를 단독으로 다루기보다 그 무렵 한국시단이 맞이해야 했던 변신의 증후의 하나로 보는 거시적인 시점에 서고 싶습니다. 롤랑 바르트의 <영도의 글쓰기>에서 제호로 딴 것으로 짐작되는 동인지 <영도>가 광주에서 김정옥, 강태열, 주명영. 박봉우, 박성룡, 정현웅 이일을 주축으로 1955년에 발간되었고(창간동인의 이름은 정확하지 않음), 대구에서 김윤환, 이영일, 허만하에 의해서 <시와비평>이(1956/2), 부산에서 김춘수와 고석규가 중심이 된 <시연구>(1956/5)가 거의 같은 해 또는 한해 터울로 발간된 연대기적 사실과, 발행 주체가 외국 문학의 새로운 물결에 관심을 가졌던 젊은 세대에 의한 것이었던 사실, 그리고 서울에서 떨어진 주변부에서 발행되었다는 점이 눈에 띄는 일입니다. 한국시의 방향을 외국문학과의 어울림 속에서 찾아보려는 비평적 시각이 지역을 뛰어넘어 번지던 지열 같은 열기를 우리는 느꼈던 것입니다.

 

이재훈:<시와비평>을 통해 오든 그룹의 영시와 영미 평론을 번역, 소개하고 시작품도 발표하셨습니다. 또한 김종길 선생의 <20세기영시선> 같은 책들을 탐독했지요. 오든, 스티븐 스펜더 등은 과격한 발언으로 사회성이나 혁명성이 강하고 실험적 기법이 두드러진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관의 측면에서는 엘리엇과 사뭇 다른 세계인데요. 김수영도 초기에 이런 영미 시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영향이 실험시와 참여시를 쓰게 된 것으로도 생각됩니다. 당시 탐독하셨던 오든 그룹의 영미 시와 담론들이 선생님의 문학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허만하:동굴에서 벗어나 동굴 바깥의 눈부신 신록의 세계가 현전하는 것을 느꼈고 그 세계 속으로 뛰어들게 해주었습니다. 첫 시집 <해조>에 수록되어 있는 일부 작품에서 그 영향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종길 시인의 「낙렵론」은 스펜더 투를 빼닮았다는 견해를 엽서에 써 보내주셨고, 김춘수 시인은 또 다른 의견을 그의 시론에서 언급했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항간의 사정을 최근 <문예중앙>(2004년 겨울호)에서 피로한바 있습니다,

 

이재훈:1957년 조지훈, 이한직,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문학예술>을 통해 추천완료하시고 1969년 첫 시집 <해조>를 발간하기까지 12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데뷔 후 첫 시집내기까지의 상황들이 궁금합니다.

 

허만하:이 세 분의 완전합의제가 <문학예술>의 실질적인 추천방식이었지만 나는 그들을 대표하는 이한직 시인의 추천으로 시단에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데뷔 후 외롭게 지냈습니다. 드물게 청탁이 있으면(<사상계>의 청탁이 인상적이었지요) 이에 응하며, 종합병원 병리과장, 대학 강사로 강단에 서기도하며 멀리서 시를 바라보며 지냈습니다. 마침 이 무렵의 내 동태를 비치는 객관적 데이터가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한 분이 기별해주었습니다. 그것은 1964년 1월 2일자 동아일보 문화면에 실려있는 박남수 시인의 「전진 없는 후퇴」라는 제목의 2회에 걸친 ‘시단시평’이었습니다. 그 글은 그의 사후에 간행된 그의 전집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은 글이라 했습니다. 꼭 한 줄의 언급이지만 중앙문단에 비친 그 무렵의 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어, 면구스러움을 무릅쓰고 그 한 줄을 이 <시와세계> 지면을 빌려 소개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가끔 재치 있는 작품을 발표하여 심심찮은 화제를 던지기도 하는 박성룡과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역동감이 있는 작품을 발표하는 허만하들이 없는 것도 어니다.”라는 반줄입니다.
등단 십 년이 지난 시인으로 시집이 없는 시인의 시집을 내는 기획에 들어갔으니 원고를 보내달라는 기별을 해주었던 사람이 전봉건 시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등단한지 오래된 김종길, 김구용 같은 선배시인도 그때까지 시집 내기를 자제하여 이 프로젝트에 따라 첫 시집을 내었던 것으로 압니다. 방순한 술은 긴 발효기간을 가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부름에 선선히 응했습니다. 그 무렵은 요즘 같이 시집 발행이 풍성한 문화풍토가 아니었습니다.

 

이재훈:청마 유치환과의 만남 또한 선생님께 중요한 의미를 가지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2001년에 청마에 관한 시와 사상과 선생님의 사유를 담은 <청마풍경>이란 책도 내셨고요. <청마풍경>에 보면 청마 선생 스스로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천문학자가 되었을 것이란 일화도 있는데요. 청마가 가지고 있었던 우주, 무한에 대한 웅장한 세계관과 선생님의 세계관과의 일정 부분 공통된 시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청마와 선생님의 세계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허만하:릴케가 말했던 내면세계 공간을 우주의 넓이 이상으로 확대하는 인식과 한자를 매개로 한 표현이 많은 점이 닮아 있겠고, 청마가 가지는 ‘위대한 소박’에 비해서 나는 더 당대의 외국 문학 사조에 예민했던 것 같습니다. 또 나는 일상성에서 평면적으로 시적 모티브로 잡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재훈: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출간하셨을 때 문단과 언론에서는 큰 주목을 하였습니다. “20세기말 문단의 일대 사건”, “허만하는 마치 스톤헨지의 유적처럼 발굴됐다. 망각의 석관을 열고 저벅저벅 걸어 나와 부동의 자세로 우뚝 섰다”와 같은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당시 선생님의 느낌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미 선생님의 작품을 알고 있었던 시인들은 이제야, 라는 말들을 많이 했었는데요. 저는 30년 만에 낸 시집, 같은 문구들은 좀 거슬리기도 했습니다. 밝은 눈을 가지지 못한 우리 문단에 대해 부끄러움도 느꼈고요.

 

허만하:어리둥절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한편 둘레의 지나친 격려가 행여 나의 오만에 이어지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타이르며 더 열심히 고유한 자기 언어를 다져야 한다고 조용히 결심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런 한편 그때의 소용돌이를 통하여 나에게 내재하는 시적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긍정적인 국면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무명이었던 내 시집을 낼 의향이 있다는 솔 출판사의 평론가 임우기씨의 전화를 통한 중후한 목소리가 아직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목소리가 나를 다시 시의 광장으로 불러내었던 것입니다.

 

이재훈:2004년 선생님께서 수상하신 청마문학상 시상식장에서 김춘수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허만하 시인은 관념시를 쓰는데, 당대의 문학 100년사에 이런 경향의 시인으로 가장 앞에 기록될 시인이다. 신라의 향가 이후로 잡더라도 허 시인의 시는 보기 드문 시이다. (…) 허만하 시인은 후배이니 만큼 같은 계통의 시를 썼다고 볼 수 있는 청마보다 진일보했다”고 평가하셨는데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허만하:단상에 앉아 있기는 했어도 마이크의 방향 때문에 듣지 못했던 이 이야기를 식이 끝난 뒤, 평론가 임우기씨와 손택수, 유홍준 시인, 그리고 최학림 부산일보 문화부차장이, 대형 유리창 넘어 한려수도가 보이는 다방에서 함께 담소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듣고 웃어 넘겼지만, 귀가 후 부산일보 문화면 기사(3/25)로 읽었을 때, 나는 김춘수 시인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지는 관념시의 새로운 수평을 떠올렸습니다. 이어 친숙하고도 낯선 사물에 독특한 언어철학을 먹이는 프랑시즈 퐁주의 시를 생각했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그날 평은 다양한 암시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그의 고향에서 그의 격려와 함께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행운은 드문 일이지요.

 

이재훈:좀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선생님의 문학을 우리 시사의 어떤 지점에 있느냐 생각하면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다른 시인들이 가지 않은 독특한 지점에 가닿아 있다는 말입니다. 문학사는 어쩔 수 없이 통시적 전후(前後)의 영향관계와 공시적인 유사성에 의해 진단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생각하실 때 어떠한 시인들과 근친관계 혹은 영향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허만하:한국시의 통시적인 또 공시적인 지형도에 유난히 어두운 나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더욱 거울은 자신을 볼 수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다만 평론가 김주연 교수가 나의 시에 대해서 “김수영, 김춘수, 김종삼을 잇는 유니크한 시세계”를 가진 것으로 읽어 준 사실이 이재훈 시인의 질의에 대답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세 번째 시집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에 대해서는 “그의 시는 언어에 대한 독특한 시선과 자의식으로 세계를 새롭게 번역해 낸다. 그 새로운 풍경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서로 넘나들고 전체와 부분이 뒤섞이며 묘한 이미지를 직조해낸다”는 <문학과사회>의 평설을 읽고 거울에 비친 내 시의 초상을 조용히 한 번 쳐다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깊이를 더하며 내 시를 몰아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시를 쓰고 있습니다만 때로 그런 궤도에서 미끄러지기도 합니다. 영향은 그렇게 가시적인 것만은 아니고 안으로 스며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국내 시인의 영향보다 외국 시인의 영향이 더 큰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도 단일한 것이 아니고 폴리포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재훈:‘풍경’과의 만남에 대해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작품 세계 속에서 중요하게 얘기되어지는 것들이 ‘풍경’에 대한 발견입니다. ‘풍경’이라는 요약어는 이제 시 속에서 하나의 중요한 방법론입니다. 풍경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보거나 풍경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보는 방식이지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풍경을 보는 방식은 좀 다른 근거에 존재해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말하자면 풍경을 보며 그 풍경을 형이상학적 사유로 체화하여 읽는 방식입니다. 또한 본다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 대한 인식도 중요하게 생각되고요. 선생님에게 ‘풍경’이 가지는 의미는 어떠한 것인지요?

 

허만하:풍경은 세계의 동의어이면서 세계의 시적 은유라는 이중성을 가진 말이라 생각합니다. 경치가 풍경이 되는 것은 경치가 형이상학적 성격을 가지는 그 순간이라 생각합니다. 그때 자연의 일부가 목숨을 얻어 숨쉬는 풍경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언어를 가지기 이전의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었지만 언어를 가지고부터 인간은 풍경의 일부가 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내가 종래의 시학 용어에 속하지 않는 ‘풍경’이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은 기존의 문화적 전통에서 형성된 지적 체계를 떠나서 새로운 출발을 위한 발판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용어를 찾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 ‘풍경’이란 말이 인간과 세계의 교섭을 다루는 모든 방법(철학. 시를 위시한 예술)을 수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또 인식의 기반이 되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나타내는데도 손색이 없는, 무한한 가변성(용량)을 가진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무렵 길 위에서 현전하는 풍경을 사귀고 있었습니다. 시는 정신적 풍경의 창조라 할 수 있지요. 우연한 일치이겠지만 두 사람의 실존주의 철학자가 풍경 속에서 그들 철학적 원리를 찾았던 것은 흥미 있는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케르케고르는 쉐란 섬 북단의 길레라이(Gilleleie) 벼랑 바닷가에서 실존을 깨달았고, 니체는 스위스의 실스 마리에서 영겁회귀사상을 얻었던 것입니다. 두 곳에서 있는 기념비를 풍경과 인간 사유의 극한이 하나가 된 자리를 기념하는 표시라 나는 생각합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시는 객관적인 묘사이기보다 감수성의 통로를 통과한 이미지입니다. 시인의 표정과 사유가 덧입혀진 묘사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미지의 방식은 때론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독자를 압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그야말로 진경입니다. 저는 이 풍경의 발현 방식이 형이상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념’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저 또한 이 방법론에 대해 무척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에서 ‘관념어’는 무척 위험한 언어로 치부되지 않습니까. 잘 된 시를 쓰기 위해 관념을 어떻게 시 속에 투영해야 하는지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허만하:묘사와 설명이 다른 것을 미리 말했던 것은 프랑시즈 퐁주의 시학입니다. 시에서 관념이 미덕이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반-미덕이 될 수는 전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나는 다만 세계와의 만남에서 잉태하는 관념이 결정화될 때까지 기다립니다. 헐벗은 관념은 철학의 영역이 아닌 시의 영역에서는 보기 민망할지 모르지만, 관념이 없는 시또한 지나치게 시적이라 나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따금 제도화된 느낌을 만나고 실망합니다. 그 실망에서 벗어나는 길에서 시인은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 냅니다. 릴케와의 만남 때 이야기 한대로 나는 처음 시를 쓸 때부터 그랬습니다. 랜섬은 형이상학적 시의 존재 이유를 밝힌 것으로 압니다. 만년의 하이데거가 사유는 정의랑 논의를 벗어난 곳에 사는 것이며 시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가진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던 사실을 나는 주목합니다. 그 무렵 그의 글은 거의 시론이지요. 사유는 노래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만물을 낳는 어머니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김현승 시인의 「검은 빛」일 수 있습니다. “노래하지 않고/노래할 것을/다 생각하고 있는/빛”(「검은빛」)일 수 있습니다. 시는 “아픔보다 더 아픈/빛을 넘어/빛에 닿는/단 하나의 빛”입니다. 백화점에서 넥타이 고르기 이야기라는 기호의 문제에 환원될지 모르지만 나는 관념이 없는 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탈구축할 지층의 두께가 없는 엷은 시보다, 외견상 반시적(?)으로 보일 수 있는 관념이 배어 있는 감성 쪽에 끌려듭니다.
이재훈 시인이 대담의 들머리에서 말했던 캠벨이 괴테를 공자, 노자, 장자와 같은 반열에 두는 것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시인 괴테보다 사상가 괴테를 보았던 것이지요. 단테를 “물음 안에서 시를 쓰는 하이에나”라 욕했던 험담가 니체가 “괴테는 내가 경의를 표하는 최후의 독일인”이라 아첨했던 것도 시인 괴테의 관념 체계에 대한 것이었지요. 이재훈 시인이 물었던 것은 잘된 시를 쓰기 위해서 관념을 어떻게 시속에 투영해야 하는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였지요.
이 질의에 대해서는 김춘수 선생이 미리 해답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함께 들어보기로 하지요. 시집 <거울 속의 천사>(114 p.)에 수록되어 있는 「시인」을 읽겠습니다. 3할은 알아듣게/아니 7할은 알아듣게 그렇게/말을 해가다가 어딘가/얼른 눈치 채지 못하게/살짝 묻어 두게/살짝이란 말 알지/펠레가 하는 몸짓 있잖아/(후략). 통영 사투리가 배어 있는 그의 육성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이재훈:그간 우리의 시가 가지는 방법론은 자아의 세계화였습니다. 즉, ‘동일성’의 시학에서 본다면 작고 하찮은 사물을 통해 우주의 진리에 대해 동일화를 꾀하는 방법론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방법론은 이미 식상할 대로 식상해졌고, 꽃과 나무로 대표되는 소재들과 바라보는 시선들도 천편일률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근간에는 ‘차이’의 시학에 대해 많은 얘기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 선생님의 시는 단연 이채로운 세계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십시오.

 

허만하:우리들의 인식이 동일성보다 차이에 눈뜬 것은 서구의 이성 만능주의의 붕괴와 거의 때를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데리다의 탈구축 작업의 중심개념의 하나인 차연(diffrance)도 상이하다는 프랑스어의 동사 diffrer가 적극적으로 가담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엇’과 ‘어떻게’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시작품에 대한 논의에서 시니피앙을 무시하고 시니피에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하는 그 무렵의 글들을 보고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극대화한 것이 그로마틀로지(데리다)이겠지요. 시는 전달할 메시지의 문제이라기보다 표현의 문제가 선행하는 언어예술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 말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학에서 보는 특징의 하나라는 지적이 현 콜로라도 대학교 영문학부의 클라그스 교수의 말과 일치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나는 전혀 그런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지요.

 

이재훈:“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대해서 추가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에서도 산문시가 많이 등장합니다. 요즘은 또한 산문시들이 아주 많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무분별한 산문시에 관해서 비판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선생님의 <길과 풍경과 시>에서 산문시에 관해 짧게 언급한 말이 있는데요. 또한 <현대시>에 「운율의 계보」라는 시론도 발표하셨습니다. 결국 산문시는 리듬으로서의 내재율이 어떻게 녹아 들어가느냐의 문제인데요. 선생님께서는 산문시의 문제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허만하:산문시에 대한 내 견해의 전모는 <현대시학>에 「산문시에 대하여」라는 글(2004년 2월호)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압니다. 내 시론으로는 좀 긴 편이지요. 산문시의 발생과 그 전개는 시의 역사에서 필연적인 것이라는 견해였습니다. 시=행갈이 운율이라는 도식적인 견해에 대한 반성이지요. 산문과 산문시는 전혀 다릅니다. 산문은 의미의 전달을 사명으로 하지만, 시는(산문시를 포함하는) 도구로서의 언어사용을 거절하는 자평에 있습니다. 언어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지평이지요. 시와 산문시의 구별(또는 비산문시와 산문시의 구별)은 하나의 개념을 이항대립구도 속에서 파악하는 로고센트리즘이 낳은 구별이 아닌지 검증해볼 필요가 있을지 모릅니다. ‘시적인 것’이 입는 언어의 의상은 시인이(또는 시적인 것 자체가) 선택할 문제입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산문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를 보면 두 가지의 길이 서로 공존하면서 수평선처럼 나란히 진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과학적 원리와 시의 원리, 즉 병리학자로서의 길과 시인으로서의 길입니다. 요즘 시인들은 대부분 두 가지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습니다. 생활인으로서의 길과 예술가의 길인데요. 그것의 괴리감에서 오는 고민들이 많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두 가지 길을 어떻게 잘 이끌어오셨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허만하:내가 실존주의 사상에 눈떴던 것은 자연과학적 세계상(때로는 역사적인 필연성이라는 위협적인 모습을 띠기도 했었다)에 대항하는 주체로서의 나의 가치를 지키기로 결심했을 때였습니다. 이 두 가지 상이한 원리는 강도 높은 집중을 요구하는 분명히 대립적 관계였습니다만 차원을 달리한 시점에 서면 상호보완적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타원이었습니다. 원은 하나의 중심을 가지지만 타원은 두 개의 중심을 가지는 궤적입니다. 하나의 중심에 자리잡지 못하고 두 개의 중심(서로 다른 두 언어체계) 사이를 왕래할 때는 갈등을 느끼기도 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또한 시를 위한 밑거름이 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만일 병리학이란 자연과학에 헌신했다면 실존으로서의 자기표현의 길은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 겁이 납니다. 그 동안 어려움 속에서 내가 시를 지켜 주기도 했지만 시 또한 나를 지켜주었고 또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정년이 지난 이 즈음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데리다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독립된 별개의 것이 아니고 서로서로 의지해서 존재하는 상관적 존재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상대방의 존재를 ‘le supplement’라고 한 견해가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재훈:릴케, 메를르 퐁티, 크리스테바, 데리다 등등 선생님께서 탐독한 시인과 철학자들입니다. 대체로 선생님의 사유는 서구적인 이성적 체계 속에서 발화되어 그것을 우리의 문법으로 체화시키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산문을 보면 동양적 사상에 대한 인식 또한 남다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년 시절에는 한학공부를 많이 하셨잖아요. 그리고 한국의 전통 문양인 기와에 대해서도 전문 연구자 이상으로 수집, 탐구하시고 <신라의 기와>(공저)라는 연구서까지 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양에 대한 관심은 어떤 부분에서 이어져오는 지 궁금합니다.

 

허만하:내 사유가 서구적인 이성적 체계 속에서 발화되어 우리의 문법으로 체화시키고 있다는 이재훈 시인의 지적은 옳은 것 같습니다. 동양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한국인의 사상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방면에 걸쳐서 손을 뻗쳐 보았지만 이렇다 할 성취가 전혀 없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적 편력이 나의 시 또는 시론에 은은하게 스며들어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수직’의 개념으로 많이 파악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실존으로서의 수직 개념이지요. 이러한 수직 개념은 다시 지층을 탐색하는 상징으로 깊은 곳으로 내려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식의 순결한 원형으로 되돌아가려는 몸짓으로 파악될 수도 있겠는데요. 메를로 퐁티의 ‘야생’이라는 개념을 말씀하신 적도 있으십니다. 이러한 인식은 동양적 사상과도 연관이 있을까요?

 

허만하:‘수직’의 개념이 단순한 기하학적 좌표(구도)의 Y축이 아닌 것은 메를로 퐁티의 철학에서 드러나 있지요. 그에게 있어서는 수직적인 것이란 존재를 실존에 잇는 한 방식이었지요. 그 자신, 그의 유저가 된 <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그가 수직적이라 부르는 것은 사르트르가 실존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의 사유체계에 있어서는 높이와 깊이는 서로 교환 가능한 관념이 되어 있지요. 이재훈 시인이 말하는 지층을 탐색하는 상징으로서의 깊은 곳도 이런 수직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런 추상적인 사유에 나는 생물학적인 차원에서의 수직 개념을 이었지요. 그것은 메를로 퐁티가 말하지 안했던 부분입니다. 원래 인간은 네발로 기어다니는 동물이었습니다. 앞발로 땅을 짚던 오래고도 오랜 생리적 습관에서 벗어나 뒷발로 대지를 밟고 벌떡 일어섰을 때가 인간이 처음으로 인간이 된 순간이라 나는 생각합니다. 수평이 수직이 된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수직적 인간이 됨으로서 비로소 두 손의 자유(=실존의 자유)를 얻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점이 높이를 얻었던 사실을 ‘수직’에서 읽어 낸 것이지요. 화순의 운주사를 찾아 야산의 정상에 누워 있는 와불 앞에 섰을 때 나는 메를로 퐁티가 말했던 수직에 homo erectus로서의 수직을 겹쳐 생각했었지요. 경주 불상들과 다른 바로크적 미를 가지는 불상들이 이 골짝에 있다는 황지우 시인의 귀뜸에 홀려 이 일대를 몇 번 찾아보았을 때였지요.
메를로 퐁티의 ‘야생’의 개념은 그의 수직개념과 맞물려 있지요. 위에서 말한 그의 최후의 저서에서 그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세계를 존재의 의미로서, 수직의 존재…야생의 존재로서 복원하는 일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야생의(sauvage) 존재란 인간의식의 반성적 분석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지각에 몸을 맡기지 않은 날것으로서의 존재이지요. 그 자신 이 용어를 시원적인(primordial), 또 날것(brut)라는 다양한 동의어를 구별 없이 쓰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시가 개입할 수 있는 틈새를 나는 읽었던 것입니다. 확연한 윤곽(정의)을 가지고 있지 않는 대상, 사람의 눈길이 머문 적 없는 정갈한 원존재( Urwesen)라는 추상을 나는 하이데거의 귀향이란 개념에 이어 본 것입니다. 철학적으로는 어불성설이지만 시는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나는 지각이전의 존재의 풍경에 야생이라는 형용사를 얹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은 시를 위한 모티프가 될 수 있다는데 시의 특권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장자는 인위를 가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세계를 混沌(혼돈)이라 이름지었지요. 이 혼돈과 메를로 퐁티의 야생을 비교해보는 것은 격조 있는 심심풀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향하는 화살표의 끝간 데가 비슷한 것 같습니다. <莊子>의 인식론이라 볼 수 잇는 제물론편(齊物論篇)에서 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혼연히 하나로 있는 것은 말하고 있지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 인간은 그것을 분석합니다. 그 분석 이전의 만물 제동(萬物齊同)의 경지를 메를로 퐁티는 야생이란 언어로 이해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메를로 퐁티의 야생이라는 개념과 연관이 있는 동양의 사상에 대한 질의는 나에게는 지나치게 어려 운 것이었습니다. 나는 끝까지 시인입니다. 이만 일어서야 할 것 같습니다.

 

이재훈:두서없는 물음에 좋은 답변 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대담이 독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허만하:알차지 못하고 두서없는 대답 사과 드립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시를 쓰겠습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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