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젓이 몽해와 들길을 소요하는 석자(錫子)
대담 : 장석주 이재훈
2013년 5월 5일. 어린이날.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장석주 시인의 <수졸재>를 찾았다. 금광저수지를 앞에 두고 책과 음악과 시가 있는 문학의 성채를 온몸으로 느꼈다. <일상의 인문학>에 나오는 약력을 보면 시인은 자신을 가리켜 ‘문장 노동자’라고 칭한다. 문장 노동자라니. 눈을 감고 깊은 세계에 빠져들고 있는 시인의 프로필 사진에서 문장가로서의 고독한 고뇌와 자부심 같은 것들이 함께 느껴졌다. 시인은 뇌의 모든 부분이 읽고 쓰는 데 최적화된 것 같다고 했다. 마치 김연아 선수의 뇌가 피겨스케이팅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듯이. 안성으로 내려와 <월든>을 집필한 숲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처럼 그 스스로 나무가 되고 풀이 되고 숲이 되는 시간들을 견뎌 마침 ‘석자(錫子)’라는 별칭을 얻게 된 내력을 어떻게 들여다봐야 할까.
이제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시인은 제주도에 새로운 집필실과 <여행자 도서관>을 만드는 게 꿈이라 했다. 이미 땅을 사 놓았고, 설계할 건축가도 있다고 했다. 몇 년 뒤 그 건축물이 지어지면 노년은 제주도에서 보낼 계획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바람 냄새를 온몸에 가득 담은 채 제주도의 <여행자 도서관>에 닿아 시인과 만나는 상상을 했다. 대담 후 우리는 중앙대 안성캠퍼스 후문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카레라이스와 돈가스를 먹었다. 그곳은 이해선 사진작가가 운영하는 <셰므아>. 사진작가가 시인을 위해 직접 내놓은 레드와인도 한잔씩 했다. 일요일 오후, 시인들의 이야기처럼 와인도 진하게 폭 익어 있었다.
이재훈 : 선생님 안녕하세요. 시집 <오랫동안>으로 받으신 11회 영랑시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몇 년 전에 제1회 질마재문학상을 받으셨지요. 그 시상식에 저도 갔었는데요. 시인으로 받는 첫 상이라는 수상소감이 남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이번 상은 또 다른 느낌이셨을 텐데요. 감회를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첫 번째로 받은 질마재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얼떨떨했어요. 문학상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번 영랑시문학상 수상 소식은 순수하게 기뻤어요. 무엇보다도 심사위원인 김남조 선생님이나 고은 선생님 같은 대선배시인들의 따뜻한 격려 같은 게 느껴졌어요. 상이란 건 즐거운 해프닝이라고 생각해요. 항상 당대 최고의 작품들이 문학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최고’라는 합의 역시 심사위원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테니까요. 수상자의 문학적 성취에 대한 판단은 엄연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재는 객관적 잣대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심사자의 주관적 정념이 객관성을 뒤집는 경우가 잦아지는 탓에 문학상이 결정되는 그 이면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그 복잡함을 이루는 요소는 문학‘성’과 심사위원들의 취향, 우연의 작동, 연륜과 인연의 그물들 같은 것들이겠죠.
이재훈 : 토지문화관에서 집필을 하시다가 어제 수졸재로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근황이 궁금합니다.
장석주 : 4월 1일부터 5월말까지 원주의 토지문화관 입주작가로서 글을 쓰고 있어요. 올해 말까지 내야 할 책들, 새로운 시집 등을 준비하고 있고요. 토지문화관을 나오면 6월 하순에서 7월 중순까지 터키와 그리스 여행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MBC 네트워크의 ‘장석주의 지중해 인문학 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기 때문인데요. 프로듀서와 촬영감독 등 6명 정도가 함께 여행할 예정입니다. 에게해 중심으로 이스탄불, 카잔차키스의 무덤이 있는 크레타 섬까지 돌아볼 겁니다. 에게해 문명과 신화, 역사,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프로그램이에요. 올해 일정은 모두 다 잡혀 있는 상태죠.
지난주에는 <철학자의 사물들>이라는 신간이 나왔고요. 5월에 <동물원과 유토피아>라는 철학적 사회비판 책이 나올 예정이구요. 그리스를 다녀오면 7, 8월 중에 다시 2권의 저서가 출간 예정이고 하반기에 4권 정도가 더 나올 예정이어서 올해만 8권 정도가 출간되겠지요. 지금이 내 인생에서 생산력이 가장 왕성할 때인 것 같네요. 20년 전에는 내가 죽을 때까지 50~60권 정도 쓸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벌써 70여권을 썼으니까요.
이재훈 : 선생님의 생산력에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 생산력을 지탱하는 일상들이 궁금합니다. 최근 발표하신 시 「큰 찰나」는 곤궁한 기억의 추체험을 통한 찰나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제가 곤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실상 그때의 시간은 오히려 순일한 시간으로 표현됩니다. “튀긴 두부 두 모를 삼키던 추분”, “두드려 펼친 북어 한 쾌를 끓이던 상강”, “삶은 고등어 한 손에 찬밥을 먹던 중양절”의 시간들은 지금 선생님께서 바라보는 지향점을 은근히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평론가 조강석은 이를 ‘마음의 섭생’으로 풀었더군요. 큰 찰나의 순간은 잡다한 일상들이 모두 거세되고 남는 단순함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지요. 산책과 독서, 집필로 대표되는 선생님의 순일한 일상은 어떠신지요?
장석주 : 튀긴 두부, 북엇국, 고등어조림은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입니다. 최근에 읽은 장-뤽 낭시의 책에 “먹는 것은 먹은 것을 몸으로 합병하는 행위가 아니라 몸을 제가 삼킨 것을 향해 여는 것, ‘안’을 가령 생선이나 무화과의 맛으로 발산하는 행위”라고 했더군요. 음식을 먹고 삼키는 행위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을 몸으로 ‘합병’하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향해 내 몸을 여는 것, ‘안’을 그 매개물에 의지해서 그것의 맛으로 저를 ‘발산’하는 행위라는 것이죠. 미각의 만족감이 삶의 행복과 연결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먹고 마셔라! 그리하면 행복해질 것이니! 몸은 마음의 외부가 아니고, 따라서 마음은 몸의 내부가 아닙니다. 다만 몸의 자명함에 견줘서 마음은 자명하지 않습니다만 몸의 섭생과 마음의 섭생이 그리 멀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에피쿠로스라는 고대 철학자의 철학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요. 추분, 상강, 중양절은 몸을 제약하는 시간의 분절들이지만, 역시 마음의 현동을 제약하기도 하겠지요. 제 일상은 대체로 단순해요. 새벽에 일어나 신문과 인터넷을 보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해요. 날마다 쓰고, 날마다 이러저러한 책들을 읽습니다. 오후에는 산책을 하고, 단골 찻집에 들러 즐기는 차를 마십니다.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고, 그것을 즐기는 편입니다.
이재훈 : 경기도 안성의 수졸재(守拙齋)의 ‘수졸’이 “재주와 기교가 뛰어난 사람이 이를 감추고 소박하고 투박하게 사는 것을 말하며,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을 말한다”(장인수)고 합니다. 많은 문인들은 부러워하기도 하죠. 하지만 조용한 곳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시가 더 안 나오더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수졸재로 터전을 옮길 당시 마음과 계획 같은 것들이 있었을텐데요. 그런 마음과 계획들이 문학적으로 잘 실천되고 있는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안성으로 내려갈 때는 몸도, 마음도, 돈도 다 거덜나버린 상태에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었어요. 생계를 걱정하고, 미래의 불안을 견뎌야 했지요. 게다가 딱히 대상이 없는 분노 같은 게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러다 죽겠다는 자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도 마음을 다독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어요. 그래서 노자와 장자를 무작정 읽었어요. 그리고 안성의 들길과 산길들을 찾아 걸었어요. 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다, 다만 잠정적으로 ‘점유’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억지로 쥐고 있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이어졌지요. 욕심과 욕망은 내 몸과 마음이 내 소유라는 확신 속에서 번성하는 겁니다. 벌써 안성 생활이 13년째 이어지고 있는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자기 위로의 시간들을 보내고, 덕분에 창작의 활화산 같은 시간들을 맞고 있는 느낌입니다. 씩씩하게 책들을 써서 밥벌이를 하고 있고, 메말랐던 감성도 충만해졌어요.
이재훈 : 위의 질문과 더불어 최근 관심가지고 계시는 노장에 대한 깊은 관심은 일상과 산책자의 관조 사이에서 체화된 것은 아닌지요?
장석주 : 노자와 장자 읽기는 안성에 정착하면서 우연으로 시작한 것이지만,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떤 필연성이 있었어요. 우선 노자와 장자를 읽을 수 있는 자유가 조건 없이 풍성하게 주어졌다는 점이지요. 안성에서의 첫 시작은 백수 노릇이었으니까요. 그랬으니 노자와 장자를 100번 이상씩 읽어낼 수 있었어요. 물론 지금도 노자와 장자의 그 심오한 철학을 다 이해하고 체화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노자> 1장에 나오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은 아직도 제 화두예요. 가끔씩 이 화두를 붙잡지만 안성에 내려와 살면서 제 심성이 너그러워진 부분이 있다면 이건 그 두 현자의 힘이 크겠지요. 인생에 대한 긍정과 여유, 넉넉한 관조적 시선,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게 했으니까요.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덜어내니까, 인생이 훨씬 더 살만한 것으로 다가오더군요. 삶을 가능한 한 단순화시키면서 책읽기와 명상, 들길이나 산길 걷기에 집중했기 때문에 지난 13년간 그 많은 책들을 읽어내고, 지치지 않고 서른 권이 넘는 책들을 써낼 수 있었지요.
이재훈 : 연보를 보면 유년 시절 충남 논산 외가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사셨지요. 그 후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선생님의 전체적인 스타일 ―문학적 양식까지 포함해서―은 도시풍의 세련됨입니다. 하지만 10여년 정도를 보낸 유년 시절은 또 다른 선생님의 문학적 토대일지도 모릅니다. 유년 시절의 원체험이 선생님의 문학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궁금합니다.
장석주 : 네, 맞습니다. 10살 무렵까지 논산의 외가에서 자랐어요. 제가 태어난 곳은 한반도의 전형적인 농촌 취락 형태로 발생한 마을이었어요. 다들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지요. 언덕을 넘으면 논으로 이루어진 평평한 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곳인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을 처음 봤을 때 현기증이랄까, 알 수 없는 공포감 같은 걸 느꼈어요. 외삼촌들을 따라 그 들로 나갔는데 논과 수로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더군요. 시선의 경이랄까요, 그 엄청난 유년기의 자연체험은 무의식에 새겨진 원체험이지요. 그 뒤 서울로 올라와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며 40여년을 살지만, 그 원체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제 안에는 유년기의 긍정적인 자연체험과 성장기의 부정적인 도시체험이 함께 들어 있어요. 그 둘은 융합하지 않고 서로 불화하며 겉돕니다. 제 의식은 그 ‘사이’에서 분열과 상처를 끌어안고 있지요. 아마 제 가장 중요한 시적 상상력은 그 ‘사이’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재훈 : 중학교 때부터 당시의 청년문단인 <학원>지에 시를 발표하고 학교에서도 책만 읽었던 외톨이였다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교련수업 거부 사건으로 제도적 교육과의 자발적 결별을 선택하게 되는데요. 지금 들어보면 상당히 주체적이고 조숙한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책으로서만 세계와 소통하던 20대 초반까지의 시간들이 천재적인 문학가가 되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을 텐데요. 그 고독한 시간들 이면에 다른 회한이나 후회 같은 것들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학원>지에 중학교 2학년 때 첫 투고한 시가 고은 시인이 뽑아 활자화 되었어요. 그때는 고은 시인이 누구인지도 모를 때였습니다. 어쨌든 그게 크게 자극이 되었어요. 7, 8편의 시들을 연속으로 발표하고, 이듬해 학원문학상에서 우수작 1석으로 뽑혔어요. 그 뒤로 고등학교에 와서는 또 단편소설을 써서 투고했는데, 소설가 임옥인 선생이 선을 해서 활자화되었고요. 그러면서 전국의 문학소년들 사이에 이름이 나고 그들과 편지를 주고받읍며 교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시절에 주변에 저를 이끌어줄 만한 스승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지요. 혼자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제 길은 스스로 찾아야만 했어요. 이 모든 일들이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어요. 제도 교육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한 것은 나중에 더 자세하게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진 거예요. 동년배의 다른 친구들이 다들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할 때 저는 무적자(無籍者)가 되어 방황을 하거나 몇 년간을 시립도서관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요. 결국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쓴 시와 평론이 1970년대의 마지막 해에 두 군데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문단에 나오고, 그게 연줄이 되어 출판사 편집부에 입사했지요. 아주 가끔 그때 혼자 외롭게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문학이나 철학 책들을 읽는 대신에, 대학에 가서 자연과학 쪽 공부를 했으면 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고 생각해 볼 때도 있습니다. 아마 그랬다면 삶은 지금과는 크게 달라졌겠지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여유도 없었고, 삶과 세계를 꿰뚫어보는 지적 능력이나 균형잡힌 ‘인지적 자각’같은 게 없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20대 초반에 이미 문학을 숙명으로 수락하고 고분고분 받아들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이재훈 : 선생님의 젊음을 가리켜 “고독과 가난, 주체할 수 없는 청춘이라는 이름의 70년대”(김태형)라고 표현했던데요. 당시는 사회참여 민중시의 시대였지 않습니까. 또 다른 대척점에는 실험시가 있었을텐데, 이도 상당히 정치적인 측면이 있죠. 당시 시문학사에서 선생님께서는 이쪽과 저쪽도 아닌 미학주의자로서 독자적인 길 쪽에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바로 밑 선생님의 후배들로부터 바슐라르에 영향받은 미학주의자들이 시단에 나타났구요. 당시 선생님의 문학적 지향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제 20대는 고독과 가난을 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그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겁니다. 그 결핍이 있었기에 문학과 음악에 대한 강렬한 열망 같은 걸 품게 된 게 아닐까요? 20대 초반 시립도서관에서 책만 읽은 게 아니라 서울 광화문에 있던 ‘르네상스’나 명동에 있던 ‘필하모니’, ‘전원’, ‘티롤’ 같은 고전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제 초기시의 미학주의적 성향은 서양 고전음악들을 접하며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이재훈 : 선생님의 청년 독서목록에는 헤세, 카프카, 사르트르, 카뮈, 니체, 바슐라르 등의 이름이 열거됩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당시 철학과 인문학의 거센 광풍은 지금보다 훨씬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독서가 추후 양서를 출판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겠죠. 지금 선생님의 사유체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나 철학자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장석주 : 10대 후반에 한국문학전집들을 독파하고 헤르만 헤세, 알베르 카뮈, 카프카, 헤밍웨이와 같은 널리 알려진 서구 작가들,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와 같은 일본작가들의 소설들을 남독하며 보냈다면, 20대 초반에는 시립도서관의 참고열람실에서 보내면서 서양 철학자들의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게 니체와 바슐라르였어요. 일종의 황홀경 같은 걸 느끼면서 그 책들을 읽었거든요. 그리고 김현과 김우창 선생의 책들을 읽으면서 내 공부가 얼마나 하찮은가를 깨달으며 엄청난 지적 자극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 초기 지적 자양분은 전적으로 이 분들에게서 얻은 것들입니다. ‘고려원’에 막 입사해서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인 <영혼의 자서전>의 교정을 봤는데요, 작가의 방대한 지적 편련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국내에 소개가 그다지 많이 되지 않은 생소한 작가였어요. <영혼의 자서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전집을 만들어보자고 출판사 사장에게 건의를 해서 그 전집이 나오게 되었지요. 나중에 ‘고려원’ 편집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출판사를 차린 것은 ‘니체 전집’을 새로 번역해서 내야 되겠다는 결심 때문이었어요. 일종의 보은(報恩)이었던 것이지요.
이재훈 : 선생님의 연보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1991, 청하) 사건입니다. 당시 이 일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권력의 개입이 전 국민에게 전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외설스런 내용의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저자를 구속한 세계 최초의 사례였다고 평가하는데요. 이 사건으로 출판 책임자로써 선생님께서도 징역형을 선고받으셨죠. 이 일로 선생님께서 출판에 대한 뜻을 접습니다. 아까운 일이었죠. 저 또한 지금까지 가장 아까운 출판사로 ‘청하’를 1순위로 꼽습니다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일로 우리는 시인이자 작가 ‘장석주’를 새롭게 얻습니다. 출판사가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왕성한 시인이자 집필자로서의 장석주를 얻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텐데요. 동의하시는지요?
장석주 : 마광수 선생의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은 참 어처구니도 없고 안타까운 일이지요. 제 인생에도 엄청난 타격이 된 ‘마이너스 체험’입니다. 그때 입은 내상(內傷) 같은 게 아직도 남아 있어요. 그 분노와 실망이 출판사를 접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출판사를 할 때 제 젊음 전체를 담보로 하는 것이었기에 치열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기획, 편집, 교정, 디자인, 영업 같은 걸 다 했었죠. 출판사가 커져서 직원이 20명, 30명으로 느니까, 출판 일과 무관한 ‘인력 관리’ 같은 게 필요해지더라구요. 그런 일들에 내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는 게 싫었어요. 필화사건을 계기로 출판사를 접고자 결단했을 때, 한편으로, 이젠 내 길을 가자, 이런 생각도 있었어요. 결국 내 길이란 내 문학, 내 글쓰기지요. 이건 일종의 역설이겠지만, 사실 출판사를 경영할 때 책을 가장 못 읽었어요. 출판사를 그만 두고 난 뒤, 출판사를 경영할 때보다 10배는 더 책을 읽게 되더군요. 이것만 보더라도 출판사를 그 시점에서 접은 것은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재훈 : 선생님의 시집은 14권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외 2권의 시선집을 내셨구요. 끊임없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시집 <햇빛사냥>(1979) 이후 몇 년 간의 터울로 계속해서 시집을 발간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집뿐 아니라, 평론 에세이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활발히 창작하셨는데요. 그런 가운데에서 쉬지 않고 시집에 큰 에너지를 쏟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다른 장르 글쓰기와의 관계 하에서 시창작의 통과의례를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그 무렵은 한창 출판사가 커가고, 그에 따른 업무들이 팽창할 땐데, 그 시들을 어느 틈에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를 쓰는 건 일종의 숨쉬기 같은 게 아니었을까. 숨을 쉬지 않으면 죽으니까,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시를 썼던 거지요. 그 시절의 시에는 아쉬운 바가 있어요. 그 시절의 시들은 좋은 시가 품어야 할 긴 시간, 느릿한 숙성, 자애의 적요(寂寥) 같은 게 모자랍니다. 일하면서 짬짬이 짧은 시간을 들여 썼으니까요.
이재훈 : 선생님의 시세계를 크게 본다면 두 갈래의 변화지점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번째 시집인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2002, 그림같은세상)는 안성에 내려가셨을 때 쓴 시집인데요. 안성에 정착한 이후로 시세계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장석주 :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2002, 그림같은세상), <붉디붉은 호랑이>(2005, 애지), <절벽>(2007, 세계사)은 ‘안성 3부작’으로 꼽을 만한 시집들입니다. 안성의 물, 바람, 흙이 들어 있고, 제가 먹은 밥과 젊은 벗들, 밤과 고독들이 고스란히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전의 시집들에 있던 도시적 메마른 감성 대신에 그늘과 여린 것들에 대한 자애, 자연의 관능성에서 연유된 활발함이 눈에 띄는데, 이것들은 제 안의 촉기가 풍성해진 결과일 겁니다. 김영랑 시인은 이 촉기를 두고 “같은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탁한 데 떨어지지 않고, 싱그러운 음색과 기름지고 생생한 기운”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런 뜻에서 그렇습니다. ‘안성 3부작’에 어떤 풍성함이 있다면 자연과 제 오감이 비벼지면서 얻어진 이 촉기 때문일 겁니다.
이재훈 : 좀 더 세분화해서 살펴본다면 네 번째 시집까지는 어둡고 절망적인 청춘의 열망이 고스란히 집약된 세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완전주의자의 꿈」을 보면 “채 끝내지 못한 교정지와/ 빈 책상들만 어둠 속에 남아 있을/ 사무실과 내가 방금 내려온 어두운 계단들이/ 내 뒤에 남겨져 있는 모든 것이다./ 나를 열기 위하여, 활짝 열려진 문처럼/ 혹은 나를 닫기 위하여, 쾅쾅 못질하여 닫아버린 문처럼/ 나는 일년을 살았다. 아니 일년을 죽었다.”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당시 세계를 절망적으로 보는 시선에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장석주 : <햇빛사냥>(1979, 고려원), <완전주의자의 꿈>(1981, 청하), <그리운 나라>(1984, 평민사), <새들은 황홀 속에 집을 짓는다>(1986, 나남)로 이어지는 초기 시편들은 청년의 순수한 자아 제일주의, 세계와 자아 사이의 찢김, 상처와 분열증, 관념주의의 우월성 따위가 두드러지지요.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지만. 체험의 직접성, 영감의 번뜩임, 광기 같은 건 희박했어요. 그저 소시민적 생활인의 옅은 비애와 메마름, 거기에 약간의 관념들이 섞여서 만들어진 세계지요.
이재훈 : 이후 중기의 시집들이라고 할 수 있는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1991, 문학과지성사),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1996, 문학과지성사),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1998, 세계사),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2001, 세계사) 등의 작품세계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됩니다. 쓸쓸하고 절망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여전하지만, 다양한 이미지의 변주와 시적 대상들을 통해 좀 더 활발해집니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시도가 있었던 때입니다. 사랑을 테마로 한 시집도 있었고, 이때부터 구체적 일상이 활발하게 드러납니다. “왜 생활은 완성되지 않는가/ 왜 생활은/ 미완성으로만 완성되는가/ 왜 생활은/ 미완성일 때 아름다운가”(「왜 생활은 완성되지 않는가」)라는 시적 전언들은 이를 잘 드러내줍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의 추억을 통한 사유도 마찬가지고요. 1990년대에는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미학적 담론들이 생성될 때인데요. 문학쪽에서 다양한 담론들이 새롭게 형성된 시기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이런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의식하셨는지요?
장석주 :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1991, 문학과지성사),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에는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서 끊임없이 타자와 자신에게 착취당하는 느낌이 불가피하게 침착되어 있지요. 자아의 궁핍함과 메마른 도시에서의 무의미함과 건조함이 격렬하게 표출되었던 시기였어요. 제대로 살려면 서울을 벗어나야하는 게 아닌가하는 강박적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숲이나 강과 같은 자연에 가까이 접하려는 열망이 있었죠. 서울 삶에 대한 진절머리 같은 것들이 나던 시기였고요. 끊임없이 가속화되는 속도 속에 갇히고 삶속에서 자아는 죽어버리고 노동기계가 되는 시간들을 견딘 거죠. 그 집단적 인식 안에 나도 속해 있었죠. 그러니까 당시에는 메마르고 어둡고 비극적인 정조의 시가 나왔어요.
좀 이색적인 시집이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인데요. 그 시집도 사실은 시를 통해 나락에 빠진 나를 필사적으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능동적 의지가 있었어요. 그 시집에 사랑시가 몇 편 있기는 하지만, 제목과는 달리 사랑 시집은 아니예요. 그 시집의 반 정도가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 화집을 보면서 떠올린 영감으로 쓴 시들이에요. 뭉크의 비극적인 삶과 내 삶이 겹쳐지죠. 그 시집에는 어떻게든 시를 붙들고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려는 몸부림, 자기 치유와 성찰, 상처와 슬픔과 모욕을 끝끝내 견뎌내려는 불굴의 의지 같은 것이 오롯합니다. 그 시들을 통해 생의 시련들을 견뎌냈어요. 2000년 여름 안성에 내려오면서 삶의 외관이나 내면의식, 감성이 커브를 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내 몸에 은닉된 도시의 자명성이 해체되고, 물, 나무, 안개, 새벽, 뱀, 너구리 따위의 자연 체험, 농약을 삼킨 개들의 죽음, 함께 놀아줄 귀신이라고 있었으면 하는 지독한 심심함, 소름끼치는 근본으로서의 고독 속에서 시가 나오니까, 그 전의 쓰던 시와는 전혀 다른 시세계가 만들어지더군요. 시골도 이미 지고지순은 아니예요. 밋밋한 시골의 삶에는 도시보다 더 끔찍한 지옥이 숨어 있어요. 그런 걸 시골에 와서 열세 해를 살면서 겪어낸 것이지요.
이재훈 : 안성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가 그 시집들에 담겨 있는 거네요. 도시에서의 삶에 대해 사유의 극점을 찍고 그 세계를 통과해야 새로운 세계로 입성할 수 있는 거니까 말이죠.
장석주 : 우리가 철학적인 어휘로 얘기를 나눴는데요. 사실은 돈이 없었어요.(모두 웃음) 제 재산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안성의 땅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죠. 안성에 살면서 초기 2년 동안은 참으로 고요했어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할 일도 없고. 2년이 지나니까 여성잡지사들 10여 군데에서 취재를 오고, EBS에서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찍어가고요. 말하자면 사람들은 시인이 호수가에 전원주택을 짓고 내려와 근사한 전원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게 당시 중산층들의 꿈이고 열망인데. 그것을 마치 내가 선점한 것처럼 비췄던 거겠죠. 여성잡지와 방송 매체를 타고 평이한 시골살림이 근사한 전원생활로 탈바꿈되어 소개되고 나니 여기저기서 원고청탁이 밀려들고, 대학에서는 강의 제안이 들어오고, 신문과 잡지에서는 연재를 하게 되었지요. 그 바람에 시골의 고요한 삶은 다 깨져버리고 서울에서보다 더 많이 바빠졌어요.
이재훈 : <절벽>(2007, 세계사) 이후의 작품들은 좀 더 인문학적, 혹은 철학적 사유가 내재화되어 드러난다고 봅니다. 가장 최근의 시집인 <오랫동안>(2012, 문예중앙)은 그 결실이 직접적으로 드러났다고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그 전 시집인 <몽해항로>(2012, 민음사)는 선생님의 전체적인 시세계 속에서 독특한 지점에서 빛이 나는 매력적인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몽해’라는 특별한 상징을 통해 내면의 사유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말이죠. 특히 상징을 통해 관념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내면의 여정이 더욱 미학적으로 완성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최근 작품들의 시가 발아하는 계기나 앞으로의 시작 향방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몽해항로>는 안성에 내려온 지 만 10년 되는 해에 나왔습니다. 안성 3부작이라고 불리는 세 시집을 낸 뒤 상상력의 중심이 안성에서 벗어나, 다시 죽음과 같은 사유와 상상력으로 회귀하더군요. 장소마다 장소의 목소리가 있는데, 이제 내 시에는 안성의 목소리가 잦아들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일부러 의식해서 쓴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안성하고는 결별하더라구요. 이재훈 시인이 잘 지적했듯이 초기의 내 시들은 죽음이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사유로 들어가니까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죠. 초기시의 관념과 지금의 관념성은 달라요. 초기시에는 체험이라는 거름망을 통과하지 않은, 책읽기를 통한 간접성에 연루된 형이상학이었다면 <몽해항로>에서 드러나는 관념성은 상당 부분 직접적이고 날 것인 체험과 연륜이 체화되고 육화된 것의 분출 같은 것이지요. 내 안에 있는 본래적인 것들의 목소리를 낸다고나 할까요. 평생 붙든 화두라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왜 태어났느냐, 왜 인간은 죽는가, 하는 형이상학적 것들인데, 그것이 깊이를 매개로 하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더라구요.
‘몽해’는 상징적인 시공이지요. ‘몽해항로’ 연작시들은 ‘몽해’라는 상상의 차가운 바다, 죽음이 무시로 출몰하는 그 가상의 시공을 통해서 존재의 유한성, 죽음에 대한 사유를 드러내는 시편들이었고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슬프니까, 시에도 슬픔과 애조가 깔려 있죠. 시에는 북풍이라든지, 차가운 바다라든지 털만 남기고 죽은 비둘기라든지 하는 죽음을 은유하는 이미지들이 많이 등장하죠. 그것이 의도적이기보다는 내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숙성된 사유와 상상력을 도약대 삼아 튀어 나온 것이죠. <몽해항로>를 기점으로 다시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을 나에게 던지고 있는 중이죠. 그와 함께 제 시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는 예감 같은 것도 하지요.
이재훈 : 시인, 소설가, 평론가, 출판인, 인문학자, 독서광이자 장서가, 대학교수, 방송인 등의 명명 중 가장 아쉬운 호칭이 있다면? 그 이유도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호칭은 외부에서 내게 붙여준 거니까 크게 의식을 안 하고요. 처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써야만 하는 생계형 글쓰기, 살아남기 위해 써야만 하는 생존형 글쓰기를 하고 있죠. 원고료나 인세를 받아 애들도 키우고, 쌀도 사고, 전기세도 내고, 의료보험도 내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게으름을 부릴 수가 없었어요. 시골에 내려올 때는 느긋하게 게으름을 좀 피울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는데, 그게 다 가망없는 희망이 되고 말았지요. 참 아이러니죠. 출판 편집, 기획자, 대학 강의, 방송 진행자, 자유기고가와 같은 다양한 경험을 한 것은 행운이죠. 나를 규정하는 여러 호칭들에서 그저 ‘시인’ 하나로 족합니다. 가장 애착이 가고요. 예술의 본질은 시가 선점하고 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삶의 물적 토대를 만들기 위해 편집자로서 출발하여 출판사 운영까지 가게 되었는데요, 그때는 정말 열심히 나를 던져 일을 했고요. 그 일에 대해서는 한 점의 회한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벌써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사람들이 물어봐요. 출판사를 하느냐, 고요. 혹은 출판 기획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것들이 까마득하게 먼 옛날 일 같은데. 가끔 내가 정말 출판 일을 하기는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죠. 그때는 최선을 다했고 인연이 다해서 출판 일에서 물러나왔을 때는 돌아보지 않았어요. 과거는 미래의 일로써만 의미가 있겠지요. 지금은 앞날과 미래의 삶이 더 중요하죠.
지금이 노년기의 초입인데, 인생 전체의 마무리에 대해 숙고할 단계가 왔다고 생각해요. 당장은 여러 출판사들과 계약된 책을 써내는 게 우선 중요하고요.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모두 성장해서 제 앞가림을 하니까 가족부양의 의무에서 좀 일찍 해방되어서 사는데 그렇게 큰돈이 필요치는 않다는 거요.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말년의 양식(樣式)’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합니다. 시와 철학을 오가며 사유하고 글을 써온 사람으로서 내 사유와 인식의 세계를 어떻게 총체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을까, 하는 양식(樣式)에 대한 고민이지요.
이재훈 : 최근에 <철학자의 사물들>이라는 신간을 출간하셨고 시집 포함해서 저서가 70여권이 있습니다. 많은 대중들에게 인문학적 사유나 지식을 교양서로 풀어내어 들려주는 작업들을 하고 계시는데요. 이런 집필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지식인으로 출판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시인이 쓰는 철학과 인문학의 글쓰기에는 어떤 자의식이 존재하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이런 글이 시와 어떤 연결 접점에서 서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전혀 다른 모드와 방식으로 생산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장석주 : 그렇지는 않아요. 20대 초반에 문학 계통의 책만 읽은 게 아니라 철학이나 미학 공부를 했어요. 그쪽 분야의 책을 나름대로 계통을 잡아서 읽었지요. 그 뒤로도 니체에서 들뢰즈로 이어지는 서양철학에 대한 독서를 꾸준히 해왔고요. 개별자로서 삶의 경험이 철학적 사유라든가 인식들과 만나고 섞이는 과정, 즉 융합을 통해 만들어진 사유의 영역이 시적 상상력과 만나는 바로 그 지점에 제 시의 자리가 생겨나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시와 철학적 사유가 따로 가는 게 아니라 상호호응하고, 상호삼투하지요. 철학, 미학, 예술에 관한 책들만이 아니라 분자생물학, 뇌과학, 양자물리학, 천문과학 같은 책들도 열심히 찾아 읽어요. 거기에 더해 건축, 요리, 축구, 야구와 같은 분야의 책들도 읽습니다. 이런 것은 다 새로운 지식들에서 제 시적 상상력의 동력을 구하기 위한 노력이지요.
인문학 주제에 대한 책쓰기는 계속되겠지요. 다행히 작년 연말에 낸 『일상의 인문학』과『마흔의 서재』가 독자 반응이 좋았어요. 지금도 인문학적 사유를 담은 교양서를 몇 권 준비하고 있는데요. 이런 것의 기초적 토대가 되는 게 독서입니다. 끊임없는 책읽기를 통해 어떤 사유의 극점까지 자신을 몰아가지요. 그런 끊임없는 책읽기를 통해 체화된 것들이 있기에 인문학적 주제에 대한 저술이 가능합니다. 책을 떠나서 ‘장석주’라는 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내 시, 내 삶, 그 바탕에는 내가 읽은 수많은 책들과 그것들에 의해 만들어진 내면의 확장이 있어요.
이재훈 : 요즘 생계형 글쓰기 때문에 바쁘시잖아요. 바둑이나 포커 등에 상당한 고수이시고 문단에서 즐겨하시면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요. 요즘은 많이 못하시겠어요.
장석주 : 다른 건 할 줄 모르고 바둑과 포커가 제가 할 줄 아는 잡기인데요. 요즘은 전혀 못하죠. 바둑은 어려서 배웠고요. 아마 3단 정도 실력이예요. 바둑 자체가 동양 철학의 집대성이예요. 그 안에 우주가 있고, 도가 있고,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가 다 녹아있어요. 바둑 둘 때는 지독하게 몰입합니다. 그 몰입이 좋은 거지요. 한때 시인 후배들하고 푼돈을 걸고 포커 게임을 즐겼는데, 온몸이 소진될 때까지 뭔가를 하고 난 뒤에 그 보상으로 뭔가에 몰입하는 기쁨 같은 것에 탐닉하는 거죠. 아주 유쾌한 탐닉이지요. 후배들 하고 게임을 할 때는 나름의 원칙이 있어요. 내가 따면 안 된다는 거예요.(웃음) 다 가난뱅이 시인들인데, 그들의 푼돈을 갈취하면 안되지요. 늘 얼마쯤 잃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며 즐겼는데. 이젠 그런 시간도 낼 수가 없어요. 술을 안마시니까, 벗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는 도락의 즐거움 같은 것도 없어요. 삶이 단순화되었어요. 내 자신의 사유에 집중하고 지속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단순화한 측면도 있죠. 대신에 혼자 고전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많이 해요. 혼자 걷는데 이게 자기 충족감이나 행복감을 주죠. 하이데거가 ‘들길’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나를 나에게 되돌려주는 시간, 사색의 능력을 풍성하게 일구는 호젓한 시간이 필요한 거죠.
이재훈 : 일요일 오후, 귀한 시간을 내주시고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많은 것을 담고 가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장석주 : 고생 많았어요. ‘수졸재’에는 6월 하순쯤이면 반딧불이가 나타나요. 반딧불이들이 어둔 수풀 위에서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며 군무를 추는 여름밤은 정말 근사해요. 그때 아이들 데리고 함께 놀러 와요.
출전 : <열린시학>, 2013년 여름호.
이재훈 | 1972년 강원도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저서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 <부재의 수사학>,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가 있다.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